당위성을 중심으로 본 한국불교 정화운동 일제식민시대의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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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성을 중심으로 본 한국불교 정화운동 일제식민시대의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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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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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국불교 역사상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 가운데 1920년대부터 태동되고 1950년대에 구체화된 불교정화(淨化)운동은 현 한국불교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는 불교계내의 분규로 이어졌으며 교육부재로 인한 사회적 대응력 약화 등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정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끊임없는 과거와의 대화 속에서 가능하며 한국불교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점을 시사해 줄 것이다.

  본고는 정화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대신 역사적 사건의 추이만을 대상으로 한정하여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연역적인 명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일제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교단의 움직임을 대세에 충실하면서 나열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다. 한국불교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도 명확한 개념 없이 일반론에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는 정화가 일제침략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는 점에 착안하여 합방이후부터 서술하겠다. 경술년의 합방은 구한말에 모든 면에 걸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합방 이전의 개화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동인 유대치 등 불교계의 인사들과 합방 이후에 활동하였던 친일파 승려들과의 관계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아 본고에서는 편의상 합방이후부터 서술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뜻있는 연구가의 연구를 기다린다.

  정화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화가 갖고 있는 어의에 대하여 그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근래에 이르러 논의되고 있는 정화의 평가문제와 관련하여 - 그것은 긍정적인 측면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의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 연결하여 소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선제(先提)요인이기 때문이다.

  정화(淨化)는 오염(汚染)의 상대어이다. 따라서 오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정화는 무의미하거나 오히려 유해한 발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염을 전제로 하는 정화는 오염으로부터의 정정회복을 의미한다. 불교정화는 불교를 유지하고 있는 교단 즉 종단, 특히 청정을 요하는 승단의 청정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교정화는 불교의 자기실현을 위한 자생활동이라고 정의되어야 하며, 청정의 수호와 오염의 배제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교단, 특히 승단의 청정을 수호하고 오염을 배척하는 청정 활동은 원시교단에 있어서 불타에 의해서 친히 살펴진 이래 3천년 가까운 교단사를 통하여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러나 본론에서는 1954년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불교교단에 나타난 불교정화에 대하여서만 논급하고자 한다.

    일제식민시대의 한국불교

  우리 교단에 있어서 정화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침략치하에서였으므로 정화의 사적 배경은 자연히 일제의 침략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910년 경술년 8월 29일을 우리는 국치일(國恥日)이라고 한다. 순종황제가 한일합방에 관한 칙유(勅諭)와 합병조약문을 공포한 이날까지 우리나라에는 일본인들이 17만 1천명이나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들 일본인 중에는 불교인들이 섞여 있어 우리 불교인들과 접촉하면서 침략정책에 따라 공작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이미 우리나라에는 일본불교 각종파의 종무국, 출장소 등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들이 우리 불교인들을 포헙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공작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나선 승려가 이회광이다.

  이회광은 종단을 설립하여 원흥사(元興寺)에 원종 종무원을 설치하고 궁극적으로 한국불교의 일본예속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회광이 원흥사에 활동거점을 정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인연이 있다. 원흥사는 왕실에 의해 이조말기에 지어진 질로 그 절의 건축 관리가 건봉사(乾鳳寺)에 의뢰되어 젊고 민첩한 이회명스님이 서기역을 맡아 실무를 지휘했다. 이회명 스님은 바로 건봉사의 보운사(寶雲師)에 입실(入室) 이회광의 동문사제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회광은 원흥사에 거점을 둘 수 있었다.

  원종대표라는 간판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회광은 국치일로부터 2개월도 채 도기 전인 10월 6일 일본의 조동종 대표 광진열삼랑(光津悅三郞)과 연합맹약(聯合盟約)을 체결하였다.

  한국불교를 일본에 예속시킬 목적으로 이 맹약은 7개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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