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께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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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 스님께 묻습니다
  • 관리자
  • 승인 2009.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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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을 하는 ‘나’도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나’에 얽매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 있을 뿐이지, 깨달은 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상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아직 자아가 남아 있고 아상이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깨달은 자가 없다’는 것은 깨달은 자라는 육신이나 존재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자아에 갇힌 생각이 없다는 말이고, 무아와 무상을 완전히 자각한 채 고정적인 실체관념을 비워버렸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나 무아는 ‘없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연기(緣起)한다’는 말입니다. 즉 있기는 있는데 그게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신기루처럼 환영처럼 잠시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무아를 바로 깨닫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러니 ‘누가 있어서 열반을 하느냐?’ 하는 질문 자체가 오류를 품고 있어요. 열반을 하는 어떤 정해진 고정불변의 실체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반한 자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실체 없이 인연 따라 생겨난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은 자입니다. 무아를 바로 깨달은 자란 말이지요. 그러니 무아를 깨친 자에게 ‘나’라는 실체적 단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나’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육근, 오온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셨습니다. 즉, 열반도 실체가 아니고, 고정된 무언가가 아닙니다. 열반을 실체시 하는 것은 진리를 실체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도 놓아버렸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걸까요? 수행한다고 하면서 그 외의 일들에 무심해지고 주위 인연들에 소홀해졌습니다. 이 공부는 어쩔 수 없이 주위와 멀어지면서 홀로 가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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