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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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 관세음보살
  • 관리자
  • 승인 2009.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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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수기

  저는 어떤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그냥 평범한 제 이야기로 시작하렵니다.

  친정아버님은 오직 한 분이신 외독자이셨어요. 그래서 늘 제 위에 오빠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신 채, 마음속으로 아들을 하나 더 원하셨던가 봅니다. 저는 그 밑에 딸이 사형제의 맏이였어요. 소원을 이루시고자 아버님은 저희 친정집 마당에 있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사당집을 헐어서는 집안 선산에다 그대로 옮겨지어서 절을 만들어 그 이름을 연화사라 하시고 논과 밭을 딸려서는 스님 한 분을 모셔다가 모두 드렸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로 7, 8살 때였던 것 같아요.

  아버님 손목을 잡고 논길, 밭길을 쭉 지나서 나지막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서 들었던 아버님의 독경 염불소리가 지금도 생생한데 그 첫 부분이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였던 진한 기억이 제 어린 머리 속에 외워져 있어요. 그리고 이내 우리 절에 들어서면 스님이 맛있는 떡을 주셨던 인자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때의 풍경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절은 저희가 희사한 사당채를 중심해서 대웅전을 짓고 요사채 등등을 건축해서 크게 발전해 있으며 절 주인도 이제는 저희가 아닙니다.

  그런데 중학교를 외국 선교사가 설립한 수피아 여중에 입학하면서 성경수업이 일주일에 4번이고 매일 학교 수업 시작 전은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학교생활이었답니다.

  저는 불교에 대한 저 자신의 믿음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학교생활에 충실했고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그냥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성경과목의 성적도 우수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교회 주일학교 반사도 해보고 합창단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에서 거의 의무적으로 교회 출석 요구를 했기에 성당에 다니는 친한 친구가 그 나이엔 힘든 고민에 빠지는 것도 봤습니다.

  그런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 활동도 하면서도 그때까지 저는 세례 받는 것은 미루고 망설이다가 그냥 수피아 여고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광주에서 은행을 다니다가 직장에서 지금의 아이들 아빠를 만나서는 결혼하였습니다.

    불교와의 만남

  친정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직장 때문에 외지에 나와 있었는데 그 전날 꿈에서 아버님이 흰 옷을 장하게 입으시고 곁에 두 분이 모시고 가는 좋은 모습을 봤어요.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니 수위 아저씨가 직장 가운을 입지 말라고 하시면서 아버님 사망 전보를 보여 주셨어요. 그때 벌써 직감적으로 ‘아버님이 어제 돌아가셨구나!’하고 느꼈어요.

  이후 1년 차이로 친정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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