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수상] 크나큰 미소 / 송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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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수상] 크나큰 미소 / 송석구
  • 송석구
  • 승인 2009.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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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이 떨어지는 광화문의 오후는 한산했다. 나는 공허(空虛)하고 허무(虛無)한 감정(感情)을 헤아릴 수 없었다. 도대체 인간은 왜 태어났으며 또 죽어야하는가? 나는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지금 이 거리를 이렇게 적막하게 걷는 나는 왜「송(宋)」씨 로서 이 땅에 태어났을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이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그러한 물음에 나 자신 무척 헤매고 있었다. 이러한 물음을 그 누구에게나 물어보더라도 나를 만족시키는 해답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딜타이」「킬케골」의 작품 속에서 일말의 동감(同感)을 얻었건만 이 근원적(根源的)인 나의 물음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중앙청 돌담을 끼고 경복궁 앞을 거닐 때였다. 존경(尊敬)하는 선배가 나의 이러한 간절한 물음을 오랫동안 침묵으로 걷다가 이렇게 말한다.

「금강경이라는 경전 속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말이 있지 이 말로써 석구의 물음에 대답할 수밖에 없군.」나는 그 말을 듣고 일체의 나의 의심이 풀려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단지 상식으로만 알고 있던 불교의 경전에 접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환희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청춘의 苦惱는 어느 정도 이것이 해소시켜 주긴 했지만 아직도 나는 확연히 얻진 못하고 있었다. 붇다의 그러한 말씀은 나를 기쁘게 하였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불교에 귀의한 신자는 되지 못했다.

도무지 절에 가서 부처님 상을 보고 절을 하고 또 그 합창 배례도 일정한 예식이 있어 그대로 하여야 하니 그런 것들도 나를 구속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우상을 놓고 절을 하는 모습. 그리고 무당집마냥 울긋불긋한 단청들이 나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절을 하기란 여간 쑥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동안 절로 다니면서 공부를 하면서도 선배한테 핀잔을 받기도 하고 믿음이 없다고 빈축을 샀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또 왜 믿어야 하는지도 명백히 납득되지 못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앙보다 이성(理性)을 믿고 있었다.

 비록 이 세계에는 불가사의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이성(理性)이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이 나에게 강했던 것은 틀림없다. 그렇게 확신했던 이성(理性)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들어가 월남(越南)전선(戰線)에 종군하면서였다. 나는 이성(理性)을 믿었다. 하지만 과연 그 이성(理性)이 무엇이냐 하고 이성(理性)의 진면목을 눈앞에 내 놓아라할 때 나는 그 대답이 막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빈 껍대기의 이성(理性)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고지 144, 언제 적으로부터 기습을 받을지 모른다. 한 달이면 20일은 방카 속에서 지내야 하고 10일은 전투를 한다. 방카 속에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수많은 시간이 무료하기 이를 데 없다. 전투를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때도 있다. 죽고 죽인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때 나는 인간의 운명(運命) 우연성(偶然性)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생각했다. 그것이 꼭 1년이다. 이성(理性)의 필연성(必然性)보다 운명의 우연성이 더 지배하는 전장이었다. 산다는 것과 죽는 것이 반반이다.

나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아침에 같이 전투에 나갔던 전우가 오후에는 없다. 언제 나도 그러한 처참한 모습이 될지 모른다. 나는 이러한 불안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죽는다는 것보다 이 불안을 해소시키는 것이 커다란 문제였다. 죽음, 불안, 우연,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자위할 수 없을까? 이 죽음의 불안을 어떻게 탈출할까?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죽음에 직면하지도 않고 죽음의 불안으로 죽을 것 같다. 여기서 나는 죽음과 대결하기로 했다. 죽음이 과연 무엇인가? 죽음의 근원을 생각키로 했다.

그때 나는 10년 전에 P선배가 말했던 금강경의 말이 생각되었다.「범소유상… 개시허망…」이것을 나는 이 세상에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언젠가는 죽는다. 즉 생(生), 주(住), 이(異), 멸(滅), 생(生), 노(老), 병(病), 사(死)로 받아 들였다. 시간의 문제이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지금 내가 이 번뇌에 가득 찬 것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언젠가 죽는다면 지금 죽으나 얼마 후에 죽으나 죽는다는 사실은 틀림없지 않는가? 그런데 다만 시간의 문제인데 그것 때문에 지금 내가 괴로워 할 것이 무엇인가? 나는 나만이 살고 싶다는 나의 집착 때문에 나는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의 해탈 그것은 곧 아집으로부터의 해방이요, 동시에 진정한 나의 발견이다. 믿음 그것은 지성이 아니다. 논리가 아니다. P선배의 처음 말을 지식으로 받았던 것이 이제 나는 믿음으로 얻은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처님의 크나큰 미소(微笑)에 합장하고 일체의 「알음알이」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 지루하고 무료한 시간들이 잔잔하여 나를 밝히는 물맛과 같이 고요하기만 하다. 나의 주인공(主人公) 그것을 들어내는 것이 삶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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