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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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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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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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현대사회의 우리들, 불교 어떻게 신행할 것인가

   불교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이제 종교가 신비와 권위로써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을까.

   불교의 시발점은 인간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상상력도 그곳에 대한 형이상학적 지식도 아니다. 고뇌하는 삶 그 중생의 현장위에서 불교는 첫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불교는 불학(佛學)이라기 보다 인간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류의 문명발달에 있어서 오늘날처럼 격변과 갈등이 첨예화 된 때는 없었다. 산업화의 물결은 이제 인류의 새로운 우상이며, 너도 나도 경제발전과 편의위주의 삶을 희구하게 되었다. 실존 철학자들의 지적처럼 이제 우리의 시대는 '인간성 상실'에서 '인간성 부재(不在)'의 시대로 접어드는 느낌마저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있는 곳에는 고뇌가 있다. 인간이 호흡하는 대지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달을 선도해온 과학을 이제 더 이상 경이의 눈으로서가 아니라 경계로서 바라다 보게 되었다. 도대체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거치른 자연속에 내던져진 고독한 삶을 자각했던 원시인들에게 그 가치기준은 훨씬 단순할 수 있다. 그때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간행복의 가치기준일 수도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빵만으로 살지 못한다. 호의호식이 행복이라면, 구정물을 탐하는 돼지는 행복한 존재여야 한다. 여물을 씹는 황소도 행복한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행복이란 내면의 완성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작은 부(富)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태산같은 부에 묻혀 있으면서도 불행한 이가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가슴을 흐르는 '상대빈곤'이다. 물질적인 면에서 볼때 불과 10년전과 비교해 보더라도 우리의 생활수준은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우리들 고뇌는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물질적 풍요는 결코 행복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여기에 불교의 당위성이 있다. 부처님 출현의 사상사적 의의는 바로 내면의 응시에 있다. 그분은 내부지향적인 당시의 사상가들과 중생들에게 인간 내면의 깊이를 통찰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인간이 삼독(三毒)의 노예로 살아 가는 한, 어떠한 자기만족도, 사회정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대인이 목 쉬도록 외치는 자유의 논리도 불교는 그것을 내면지향적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논리구조를 갖는다.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그리고 교육기회의 균등 등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모두 외부적 억압에서의 자유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 구속을 외부적인 것만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의 불화, 그 끓어 오르는 탐욕의 불길이야말로 대립과 갈등의 근원이라고 본다. 내면의 완성인 진실한 자유는 삼학(三學)이라고도 하고 해탈(解脫)이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방황하는 영혼은 우주를 맴돈다. 너나 없이 '가지기 싸움'에 혈안이 되어 이 맑은 허공을 이기심의 공해로 물들여 가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결연히 외친다. 만법(萬法)은 하나로 돌아가고, 우주의 질서는 모두 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비롯됨을 천명한다. 진실한 삶은 결코 세속적 만족에 있지 아니한다. 오히려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그 진리의 음성들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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