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을 들으러 온 학생들에게 필자는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글을 써 보라고 한다. 처음에 아주 쉽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시작한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떠들썩하던 강의실이 조용해지면서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써야 하는지의 문제로 끙끙대기 시작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자신이 자기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니 점점 어려워지더라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한번도 자기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쓰라고 해서 새삼스럽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학생도 있다.
나는 가끔 주부들에게 이런 과제를 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를 상상해 본다. 학생들은 '내 이름은 ㄱ이다'라고 서두에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주부들은 어떻게 쓸까? '나는 ㅁ의 엄마인데요'라고 먼저 말하지 않을까?
결혼 후 시골에서 십 년 정도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 때 친구 모임에 처음 갔을 때의 어리둥절하고 묘한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부르는 이름들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친구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고 거기 모인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또 이야기 도중에 '○○있잖니'하는데 나중에 친구의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 알 수 있었다. 알고보니 친구들은 서로 자신의 아이 이름으로 호칭하고 있었고,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결혼하고 '어머니-주부'로서 사회에 진입한 친구에 대한 예의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무슨 댁, 아무개 네'로 불리웠던 것처럼 대학교육을 받은 필자의 친구들도 가족들이 아닌 학교 친구 사이인데도 본인 이름을 부르지 않고, '○○네'도 아닌 자신의 아이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 할머니들은 여자는 바느질과 살림만 잘 배우면 된다는 고리타분한 남존여비 사상의 영향으로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이름도 제대로 지어받지 못했고('딸고만' '섭섭이'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교육은 엄두도 못내었기 때문에 이름 석자나마 읽고 쓸 줄 아는 분이 드물었다.
그러다가 결혼하면 친정 동네이름을 따서 '무슨 댁'으로 불리워졌고, 아이 이름을 따서 '아무개 네'면 그만이었다. 친정쪽에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신랑 성씨를 따서 '김실이' '박실이'로 불러주었기 때문에 전통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하면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은 사라지고 대신 가족내에서 새롭게 주어진 역할자의 호칭으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부계부권적인 가족이 골격을 이룬 사회에서 여성은 오직 출산자(특히 아들을 낳아주는)로서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개인 여성의 이름은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가족과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아들의 어머니로 불리워지는 것이 훨씬 좋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이 자기를 소개할 때 이름을 먼저 밝히듯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이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일본 식민지 지배자들은 강점기동안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말과 글을 빼앗았고 마지막엔 창씨 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식 이름을 못쓰게 하였는데, 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이름을 말살함으로써 조선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결혼과 더불어 주부들이 이름을 잃어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 남성우위의 사회구조, 특히 여성을 하시하고 철저하게 남성에게 예속시켰던 유교이념이 지배하는 전통적인 가족구조와 관계가 있다.
딸은 결혼하면 가족집단으로부터 '출가외인'이 되는 동시에 전혀 낯선 시집이란 가족집단에 성(姓)이 다른 '외인'으로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의 전통관습은 여성들이 시집 가족의 일원이 되어 이름과 '나'라는 개념을 잊고 '착한 아내, 어머니, 며느리, 새언니, 형수' 등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요구당하게 된다. 그런 과정속에서 여성들은 가족속에 매몰되면서 스스로도 자기 이름이 생소해지고 서서히 자아를 상실해 가는 것이다.
부계부권적 가족제도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어머니'(특히 아들의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로서 사회와 가족이 바라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자신이 이기적인 것 같고 죄책감마저 느끼는 것이 이름을 상실한 채 살아온 주부들 대부분의 모습이다.
그리고 자녀와 가족을 위해 '자아'를 없애고 희생적으로 살아온 이 여성들은 자녀가 성장하여 독립하여 나가고 나면 갑자기 텅빈 둥지를 보면서 그때서야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내조잘하는 착한 여자가 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 살아온 많은 주부들이 '주부병'이라는 우울증을 앓는다고 하는데 전문가의 의하면 근본 원인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잃어버린데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사람은 자아형성에 문제가 생기고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잃었을 때는 더욱 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이름 상실로 상징되는 한국 여성의 자아상실적인 삶은 전통적인 여성 역할의 틀속에 자신을 '짜맞추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억눌리고 삭여온 개인으로서의 여성자아의 현장이 '한'으로 응어리져 있는 것이다.
그동안 사회가 변화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남아선호사상은 끝이 안보이고 아들을 고리로 한 여성들이 삶의 질곡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회 경제적인 조건들의 변화와 80년 이후 여성의 인간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젊은 신세대 주변에서 결혼관, 가족관, 부부관에 관해 커다란 의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가족법 개정으로 아들, 딸이 동등한 상속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제도상의 큰 변화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요즈음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아서 '빛나게' 쓰고 있는 직장 여성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여성 경제 참여율 46%). 직장 여성들 간에는 이미 명함이 보편화되어 있으며, 딸의 명함을 받아보는 어머니들은 왠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명함이란 남자들 특히 근사한 직장이나 유명한 남자들이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명함은 이름과 전화번호 또는 주소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되었고, 여자 친구 사이에서도 활용될 수 있는 일상적인 용품이 되었다.
필자는 친구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는 명함을 만들어 쓰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한 적이 있다. 번거롭게 물어보고 전화번호쓴다고 수첩을 꺼내고 볼펜찾느라 핸드백을 뒤지는 수고를 할 것이 아니라, 비용도 얼마 들지 않으니 예쁜 명함을 각자 만들어서 사용하면 편리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아가 생활의 편리함 외에 자칫 사장되기 쉬운 가정주부의 이름도 살려 쓰면서 동시에 역할에서 벗어난 자기자신 찾기의 작은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권해보았던 것이다.
가족이 여성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여성의 삶은 곧 가족이어야 한다. 어머니의 삶은 자기 이름과 자아를 부정하고 희생과 봉사여야 한다는 등식은 가족 모두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적인 가족의 원칙은 가족원이 각자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데 있다고 했다. 이제 더이상 여성들이 가족뒤에 숨어서 사는 것은 미덕이 아니며, 그대 등뒤에 서서 '나'도 죽이고 이름도 죽이면서 개성없는 존재로 의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여성의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없다.
민주적인 가족의 가정주부는 자신의 이름과 자아를 살려쓰는 지혜를 가진 여성을 것이며, 자신의 인간됨과 주부됨을 잘 분별하여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잊어버리지 않은 여성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