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라! 무(無)라!
상태바
무(無)라! 무(無)라!
  • 관리자
  • 승인 2009.03.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 뵙고 싶은 큰 스님 / 효봉스님

누구든지 삶의 궤적을 풀다보면 소설 책 몇 권 분량은 족히 될 것이라고 하겠지만 효봉 스님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가신 분도 드물 것이다. 동산, 금오, 청담 선사와 더불어 현대불교사에 우뚝 선 효봉 큰 스님의 대단한 이력은 그 별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법조사상 최초로 임명된 법관이었던 이력 때문에 판사중이라는 별명도 있고(우연히 절에 들른 일본인 판사에 의해 전직이 드러나자 스님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남행을 결심하였다), 사형선고를 내린 뒤 그 괴로움과 삶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판사직을 버리고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방랑생활을 했다 하여 ‘엿장수중’이라는 별명도 있다.

한편 ‘절구통 수좌’, ‘무(無)라 노장’이라는 별명에서는 고행과 정진을 철저히 한 수행자로서의 치열한 구도열과 깨달음, ‘정진제일 효봉 스님’으로서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때는 1925년 음력 칠월 초여드레, 자유로운 엿장수의 발길은 구름처럼 금강산에 이르렀고, 당시 금강산 도인으로 유명했던 석두 스님을 찾아 신계사로 향했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에, 서슴없이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즉문즉답, 마치 화두를 타파한 듯한 그의 몸짓에 그대로 법기(法器)임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로 삼았다. 신동, 판사, 엿장수로 불리던 이찬형 역시 수행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 날 이후로 입적하실 때까지 칠월 초여드레를 생일로 여겼다.

나이 서른 여덞의 늦깎이는 겸손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정진했다. 번뇌가 크면 깨달음도 크다던가. 절망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기에 화두가 성성했고, 경행도 쉼도 없이 정진했다. 절구통 수좌, 움직이지 않는 돌부처가 되어 석 달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엉덩이의 살이 헐어서 진물이 흘러 중의와 방석에 달라붙었다.

그 후 토굴에 들었다.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1년 6개월 만에 토굴벽을 박차고 나와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달린다.”라는 내용의 오도송을 읊었다.

생사 해탈의 도리,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인 소식을 깨달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스승 효봉 스님은 어린애를 대할 때는 다정한 친구였고, 납자들을 제접할 때는 준엄한 스승이었고, 신도들을 맞이할 때는 인자한 어버이였다.

효봉 스님의 제자였던 일관 수좌(전국 신도회장이었던 박완일 선생)가 5.16이후 빨갱이로 몰려 도망자 신세가 되었는데, 정보계 형사의 으름장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숨겨준 것은 물론이고 제자의 생일까지 기억하고 챙겨주시는 스님의 자상한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효봉 스님, 우리 곁에 온 부처는 그렇게 따뜻하고 자비로웠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