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무엇으로 중노릇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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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무엇으로 중노릇 할래
  • 관리자
  • 승인 2008.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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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모 (欽慕) - 성준 스님의 제자 도후 스님
▲ 도후 스님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우리 스님

“‘정화(淨化) 6비구’를 아십니까? 불교정화운동 당시 대법원에서 대처 측의 손을 들어준 일이 있었습니다. 비구 승단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죠. 그때 여섯 분의 젊은 비구스님이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순교단을 결성해 대법원장실 앞에서 할복을 했습니다. 이른바 대법원 할복사건인데, 이 사건의 주동자가 바로 우리 스님이셨습니다. 목숨은 버릴지언정 계를 파하거나 뜻을 버리진 않았던 어른이셨죠.”

1960년 11월 24일 대법원을 피로 물들인 사법사상 초유의 사건, 그 중심에 있었던 이가 성준 스님이다. 이 일로 스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 파장과 충격은 컸고 스러져가던 정화운동의 불씨는 다시 살아나, 마침내 1962년 통합종단 구성으로 회향되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마치 영웅담을 읽은 것처럼 가슴이 후끈해지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도후 스님은 그렇게 50여 년 전 아득한 이야기부터 툭 던져놓고서야 차를 권했다. 낮게 내려앉은 눈매에 순간 어린제자의 수줍은 미소가 맺힌다. “저는요, 지금도 우리 스님 생각하면 무섭고 어렵고 그래요. 앞에 서면 오금이 저리고 돌아서면 뒤꼭지가 땡기고 그야말로 숨조차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종단 일 보시랴 불사하시랴 그러면서 정진도 열심히 하셨는데, 우리 스님은 못 보고 못 듣는 것이 없었습니다. 누가 늦잠을 잤는지, 누가 울력에 소홀했는지, 누가 삼보정재를 함부로 했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했습니다. 정말 그때는 어떻게 하면 은사스님한테서 도망갈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종단의 중진스님이 되었고 세수 60 고개에 서 있건만 은사스님을 회고하는 도후 스님의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가 가득하다. 자식 낳아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세월이 가고 상좌를 들이고 보니 송구하게도 이제야 알겠더란다.

효자는 부모 사후에 흔들리지 않고, 불효자는 부모 사후에 크게 아파한다고 했다. 성준 스님의 상좌스님들은 은사스님 사후에 많이 아파해야 했다. 중노릇이 뭔지, 수행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제자들이 채 익히기도 전에 성준 스님이 떠난 까닭이다. 무섭기도 그렇게 무섭고 인색하기도 그렇게 인색했던 스승은 그 까닭을 화두처럼 남기고는 홀연 떠난 것이다. 1977년 9월 24일, 세수 46세, 법랍 23세. 미처 준비할 사이도 없이 맞닥뜨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별이었다.

“그때 우리는 스님의 엄격한 교육방식이 무작정 싫었거든요. 참 많이 방황도 하고 일부러 어긋나기도 했습니다. 비춰보면 우리들은 가난한 집 애들 같았어요. 다른 스님 밑에 있는 상좌스님들이 입다 남은 가사를 얻어 입고, 양말 한 켤레도 다 떨어진 것을 확인 받아야 겨우 얻어 쓰고, 심지어는 강원 갈 때도 가는 차비만 주고 오는 차비는 안 주셨을 정도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나마도 영수증을 꼭 받아내셨는데, 10원 한 장만 어긋나도 결제를 안 해주셨어요. 삼보정재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니니 시물 무서운 줄 알라는 말씀이셨죠. 얼마나 엄했는지…. 걸망 안 싸본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스님 곁을 떠나고 싶어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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