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의심하는 자는 또한 남에게 의심을 받는다. 옛 도인이 호랑이와 함께 지낸 것은 이 이치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1. 인정을 살펴라
초당선사가 말하였다. 총림의 주지가 된다는 것은 별 것이 아니라. 요긴한 것은 인정을 자세히 살펴서 위 아래 모든 사람의 사정을 두루 ㅇ는 데 있다. 인정을 자세히 살펴 알게 되면 안과 밖이 서로 화합하고 위 아래가 통하며 백 가지 일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니 총림의 주지는 이런 데서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정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상하 뜻을 통하지 못한다면 상하가 어긋나 백 가지 일이 거슬리게 된다. 이래서는 잘 하는 주지가 못된다.
주인되는 자가 자신의 총명을 믿고 자기 편견을 집착하여 물정을 모르거나 공론을 뒤로 하고 자기 권위만을 소중히 하거나 대중의 여론보다 자신의 일반적 뜻을 행한다면 일은 점점 막히게 되고 대중의 신임을 잃게 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글을 싫어하고 자기의 익힌바 습관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큰 성취는 바랄수 없는 것이다.
2. 마음이 정당해야
초당선사가 말하였다.
학자로서 몸을 세우고저 함은 무엇보다 행하는 것이 바르고 온당하여야 한다. 남이 시비를 일으킬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대양의 평시자는 도학이 높아 총림에서 존중되었지만 마음을 잘못썼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였다. 급기야는 몸을 구덩이에서 마치지 않았던가. 이것은 어찌 한 학자의 일일까 보냐. 일방에 주인이 되어서 가장 삼가고 두려워 할 일이다.
주: 평시자는 명안선사의 시자가 되어 그의 깊은 뜻을 잘 알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모함해서 도반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미워하였다. 대양에 있을 때 선사의 탑을 열고 보니 그의 얼굴이 생시와 같은 것을 보고 불을 놓았다. 그래도 타지 않으므로 뇌를 파하고 불을 길렀다. 이죄로 인하여 옷을 벗기우고 쫒겨났는데 스스로 황수재라고 칭하면서 제방을 유랑하였지만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생 고생 끝에 마침내 길 가다가 호랑이에 물리고 함정에 던져져 죽었다.
3. 친소를 두지말라
회당선사가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교화할 때, 거기에는 온갖 계층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는 결코 친소를두지 않아야 한다.
재주와 덕망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자가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ㅗ 멀리하여도 아니된다. 또한 견식이 없고 대중에게 미움받는 사람을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친하면 안된다. 구렇게 하면 어진 사람은 스스로 성장하고 불초자는 스스로 물려가 총림이 편안하게 된다.
만약 주인 되는 자가 즐겨 사심을 마음대로하고 자기의 뜻 맞는대로 사람을 쓰면 어진 사람은 숨게되고 불초자는 다투어 나아갈 것이니 이러고서는 기강이 문란하여 총림은 쾌하게 된다.
이 두 가지가 주지를 하는 요결이다. 진실로 자세하게 이를 실천하면 가까이 있는 자는 기뻐하고 멀리 있는 자는 서로 전하리라. 그렇다면 어찌 도가 행하여 지지않고 납자가 모여들지 않을 것을 염려 할 것인가.
4. 납자를 말 다루듯이
초당선사가 말하였다.
총림이 생긴이래 사람을 많이 얻어 도풍이 성왕한 것은 석두 마조 설봉 운문만 같은 이는 없다. 근래에 와서는 오직 황룡 오조의 주 노장이 있을 뿐이다. 진실로 능히 사방에 영특하고 쮜어난 납자들으 잘 수습한다. 그릇의 엷고 깊은 재질과 성품의 능하고 능핮 못함에 따라서 그를 개발하여 성취시킨다. 마치 가벼운 수레를 타고서 날센 말을 어거하면 말 고삐를 잡고 회초리를 날리는 것과 같다. 늩추고 당기는 것은 그의 생각대로 되니 어느 곳이고 이르지 못할 곳이 있으랴.
주 석두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는 21인, 마조선사의 사법은 84인, 운문선사의 사법제자는 24인이고 오조법연선사의 사법제자는 22인이다.
5. 자존심을 버려라
초당선사가 말하였다.
총림의 주지로서 요긴한 것은 치우친 말과 스스로 존대하자는 폐단을 삼가하는 데 있다. 사물을 대하기 전에 미리 생각을 가져 그것으로 주장을 삼지 않는다면 소인들의 아첨이나 고자질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란 그마음 형태가 한결같지 않으므로 지극히 공변되 의견을 보기 어려운 것이니 모름지기 이익만을 찾는 변통을 살펴서 가부를 세밀히 하여야 한다.
6. 소와 까치사이
산당선사가 말하였다.
뱁과 호랑이는 솔개의 원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솔개는 이들을 보면 소리침은 웬 일인가. 그것은 저와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소나 돼지는 까치가 의거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까치등이 모여서 말의 등에 앉는 것은 웬일인가. 그것은 저에 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조주선사가 어떤 암주를 찾아갔는데 마침 생반을 하고 있었다. 조주스님이 물었다. "사람을 보고 어째서 달아나는가요" 암주는 아무말 못하고 있다가 이 말을 도리어 조주에게 물었다. 조주스님이 대답하였다. "나에게 죽일 마음이 있기 때문이요" 하였다.
이에서 보는 거와 같이 사람을 의심하는 자는 다른 사람도 또한 그를 의심한다. 옛 도인이 범이나 호랑이와 함께 지낸 것은 이 이치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방거사가 말하기를 "철우는 사자후를 겁내지 않으니 마치 목인이나 꽃이나 새를 보는 것과 같다." 했으니 이 말이 이도리를 다 말한 것이라 하겠다.
주1 : 조주스님이 어떤 암주에게 물었다. "무엇하고 오시오?" "생반하고 옵니다." "까마귀가 어째서 날아갑니까?" "내가 겁이나서 날아가지요." "그게 무슨 말이요?" 암주는 이말에 대답을 못하다가 이말을 조주에게 물었다 . "까마귀가 어째서 날아 갑니까?" "나에게 살생할 마음이 있기 때문이오." 하였다.
주2 : 생반은 스님들이 공양할 때 귀신에게 먹이려고 밥 몇 알을 내놓는다. 이것이 생반이다.
주3 : 엄양존자는 항상 뱀 한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를 곁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밥을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