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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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 관리자
  • 승인 2007.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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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26)/ 원 효 성 사

신록이 차츰 짙어지면서 바야흐로 여름도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원효는 화엄경소(華嚴經蔬)를 회향품(回向品)에서 절필(絶筆)했다.

화엄경의 가르침은 그 대의(大意)에 있어 여기에서 더 설할 것이 없다고 본 때문이었다.

원효보다 먼저 화엄경소를 지은이는 일찍이 없었으니 선배에게 견주어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훨씬 뒤의 인물인 중국의 청량국사(淸凉國師)나 통현장자(通玄長者)와 비겨 말한다면 과연 원효의 화엄경소의 가치는 얼마만한 저서일까?

청량국사는 80권의 화엄경을 소(蔬)하였고, 통현장자도 80화엄에 논(論)을 지었다.

청량국사는 화엄경소를 저술하면서 자주 원효의 화엄경소를 인용하였음을 본다.

중국의 화엄학 대가들 거의가 원효의 화엄경소를 깊이 연구하고 자기의 저서에서 인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원효는 과연 큰 불사를 해낸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일찍이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신 이래 그로부터 육백년 쯤 뒤에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출세하여 묻혀진 화엄경을 발굴해 내었고, 또 그로부터 약 천 년 뒤인 신라의 원효가 출현하여 화엄학을 완성, 선양하게 된 것이다.

용수보살을 제2의 석가여래라 칭한다면 원효를 제3의 석가여래라 칭하여도 무방하리만큼 원효는 실로 대작불사(大作佛事)를 이제 회향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서 분황사의 외딴채인 무애당(無碍堂) 주인 원효가 이처럼 크나큰 불사를 해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항상 지도해 준 지명법사(智明法師)나 원효를 중 만들어 준 원광법사(圓光法師), 그리고 원광법사의 말제자인 대안(大安)과 월명 등등 원로급 노승들이었고 가까이 그를 모시고 있는 제자들 몇몇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원효가 필을 놓은 뒤, 지명법사에게 인사를 가서 화엄경소를 끝낸 기쁨을 여쭙자,

“다 끝냈다구? 정말 큰 불사를 마쳤네. 장한 일 이로고.”

이렇게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중에는 원효를 향하여 큰절을 삼배나 하였다.

“이제는 내가 스승이 아니라 효대사(曉大師)가 나의 스승일세.”

이렇게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기뻐하고 칭찬해 주는 노덕스님과는 대조적으로 황룡사의 자장법사(慈藏法師)는 뭐가 불만이었는지 입을 꼭 다물고 일체 말이 없었다.

원효의 성장을 은근히 질투해온 석도 아는 이는 다 알고 있고 그러한 자장을 그릇이 적은 탓이라고들 핀잔하는 노덕스님도 더러 있었던 것을 미뤄 볼 적에 자장으로서 언급을 회피하는 그 뜻이 족히 짐작이 되는 터이지만 아무튼 자장법사는 일체 말이 없었다. 자장을 따르며 율학(律學)을 전공하는 스님들은 자장보다 한술 더 떠서 원효를 시기하기도 하고 깎아내리기를 서슴지 않았으므로 이번에 화엄경소를 끝냈다는 소문을 듣고는,

“화엄경소가 무에 그리 대단한 것인가? 문자의 유희인 걸.”

이렇게 깔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평하든 아무튼 원효는 화엄경소를 다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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