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의 공덕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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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의 공덕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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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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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의 세계 {下}

  [1] 반야바라밀다 의미

  반야란 지혜를 의미하고, 바라밀이란 완성을 말한다. 이 지혜의 완성이란 먼저 지혜란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오늘날 지식과 지혜의 구별은 개론적인 얘기이다. 그러기에 지식이란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사실적, 경험적 인식을 말함으로 결국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 의한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사실적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 우리의 정신, 즉 의식상에 일어나는 일체의 생각들을 어둠으로 보고, 그 어두운 망상을 고요하게 하여 자유롭게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반야, 즉 지혜란 무분별지{無分別知}를 말한다. 무분별지란 분별지의 반대이다. 따라서 분별지란 말 그대로 나와 너를 구별하는 데서 부터 앎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다,.저것이다, 좋다,.나쁘다,.있다,.없다라는 분석적인 사고에 의하여 결론 지어진 인식이다. 이러한 세계란 결국 경험적이고 강각적인 물질세계로 말할 수 있는 대상이다.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소유의 대상이 된다. 소유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욕망을 자극하고 그 자극된 욕망은 본능을 억제치 못하여, 시{是}, 비{非}, 선{善}, 악{惡}이 일어나게 되고 종국에는 불행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무분별지란 그러한 경험의 대상이 아니고,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다. 그러기에 이러한 세계를 초경험적, 또는 초감각적 세계로써 {말할 수 없는] 세계이다. 말할 수 없는 세계이기에 그것은 말로써 이해될 수 없다. 말을 떠난 세계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인정은 곧 믿음을 가지게 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저와 같은 지혜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슬프고, 괴롭고, 즐겁고, 증오스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눈으로 보고, 만지는 물질적인 것만이 있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지혜인 마음의 본체는 조금도 흔들림도 걸림도 없다.

  그리하여 육조{六祖}스님은 [본성품인 이 불{佛}을 아는 것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불은 형상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분별지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건이나 물건을 볼 때 그것을 분석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은 명백하게 다른 것과 차이가 있는 특성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성과 특성을 만지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환원해 버리면 우리의 차별과 집착은 벗어나게 마련이다. 하나를 하나로만 보는 것은 분별의 세계로 지혜가 아니다. 그러나 그 하나라는 것은 본래 전체 속의 하나로  보아 그것에 고유성을 주지 않을 때 무분별지가 있게 된다.

  B,S 라즈니쉬는 그의 반야심경 강의에서 인간의 의식세계를 원시경전의 7개의 사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원용하여 7가지 단계로 설명하였다.

  첫째가 물질적인 사원으로 물질적인 것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무엇인가 잃어버렸다 생각하고 소유욕에 불타고 감각적인 쾌락만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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