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중공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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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중공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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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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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초록

-이 글은 지난 10월 20일 佛光寺에서 행한 강연 요지이다- 편집부 

  ꊱ 중공(中共)의 첫인상

  중공의 성지순례계획은 작년부터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한국 스님들의 비자 발급에만도 몇 개월이 소요될 만큼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9월 1일부터 3주간 중공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모두 21명인데 숭산(崇山)스님과 저를 포함 한국인이 네 사람이며 나머지는 모두 외국인이었습니다.

  9월 1일, 홍콩의 구룡역(九龍驛)을 출발하여 4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인구 3백만이 산다는 상업과 관광의 도시인 광주(廣州)에 갔습니다. 광주까지 가는 동안 차창 밖의 풍경은 별로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공공건물이나 역광장에 붙어 있을 법한 붉은 글씨의 선전 현수막도 없었고 제복을 입은 군인이나 감시원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대신 일본의 전자제품이나 일용품 광고와 코카콜라 광고가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곳이 공산국이라 긴장 했었는데 점차 안심이 되었습니다.

   ꊲ 선종도량 남화사(南華寺)

  광주에 도착해서 안내원을 따라 간 곳은 임제종 사찰인 육용사(六榕寺)였습니다. 70이 넘어 보이는 주지 운봉(雲峰)스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며 객실에서 차를 마시고 선물도 교환했습니다. 18명의 스님이 기거한다는 이곳은 해인사 정도의  크기였는데 중공에선 작은 절에 속한다고 합니다. 700명이 기거하는 사찰도 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달마전, 육조당, 9층 탑과 요사채가 대웅전 법당과 함께 어울려 사찰의 면모를 갖춘 육용사는 약 1450년전 양무제가 창건했다는 고찰로서 원래 이름은 정혜사(淨慧寺)였고 육조 혜능이 이곳에서 직접 선을 지도했다 합니다.

  육조대사, 달마대사, 관세음보살 행적지를 순례하고자 우리는 다음날, 다섯 시간 가량 차를 타고 소관(昭關)에 있는 조계(曹溪)의 남화사(南華寺)를 찾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중공 제일 국보 사찰인 남화사는 육조대사께서 주석하여 남종선법(南宗禪法)을 크게 떨친 너무나 유명한 도량이 아닙니까?

  육조대사의 법보단경 서문(序文)을 보면, 인도의 고승 지약삼장(地藥三藏)이 조계 어귀를 지나면서 수승(殊勝)한 산수(山水)와 범상치 않은 물맛을 보고 이곳에 절을 세우면 도를 얻는 자가 숲과 같이 많을 것이니 절 이름은 마땅히 보림(寶林)으로 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로 이 남화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범궁(梵宮)은 양(梁) 천간(天監) 3년(504)에 낙성하였으며 보림사에서 남화사로 968년에 개명했던 것입니다. 법난에 크게 시달리던 문화혁명 당시에도 국보사찰이라 하여 파괴하지 않은 남화사는 몇 십 동(棟)의 요사채가 모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큰 절이기 때문에 돌아다니다 보면 다리가 아플 정도입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사천왕문이 나오는데 그 좌우로 배를 앞으로 내밀고 껄껄 웃는 모습으로 포대화상인 거대한 미륵존불이 모셔져 있고 참배를 할 수 있도록 큰 향로가 놓여져 있습니다. 미륵존불의 뒤로는 커다란 칼을 쥐고서 법당을 경호하는 모습으로 위태천신(韋太天神)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당 뒤로 탑처럼 큰 향로가 서있고 다시 법당이 있고 다시 그 뒤로 향로가 있고 법당이 나오는 식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법당의 외부는 이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일층으로 되어 있는데 카메라로 찍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좌우로는 500나한상이 나무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모습, 웃거나 깊이 생각하는 모습 등 갖가지 형상으로 모셔져 있는데 중공에서도 하나 밖에 없다는 국보라고 합니다.

  음력 8월 3일에는 육조대사의 입멸을 추모하는 큰 행사가 거행되는데 수십만 명이 참여한다고 합니다.

  육조당에는 육조대사의 진신이 모셔져 있었는데 붉은 가사를 입고 계셨고 몸은 까만빛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 진신을 보고 숭산스님이 우리나라의 쌍계사에도 육조대사의 머리가 모셔져 있는데 어느 게 진짜냐고 물었더니, 그곳 스님의 말이 남화사에 계신 머리가 진짜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법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장경각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박물관식으로 서랍이나 상자속에 8만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으며 육조대사가 노행자 시절에 쓰던 방앗공이도 있었는데 사진을 직지 못하게 하더군요

  문화혁명 당시 많은 스님들이 쫓겨나거나 사역을 당했는가 하면 농사를 짓서가 자살을 하거나 일구월심(一久月深) 성적(聖蹟)이 복구되길 기다리며 지냈다고 합니다. 아직도 복구하는 중이라 일손이 달리기 때문에 삼동결제는 못하고 일년에 몇 차례씩 일 주일의 용맹정진만 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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