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외로움, 그리고 마르지 않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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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외로움, 그리고 마르지 않는 눈물
  • 관리자
  • 승인 2007.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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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손길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여리고 순한 꽃잎을 피워내던 봄이 지나고, 계절은 남성미를 자랑하듯 진초록 잎을 토해내는 한편 성숙한 숙녀라도 된 듯 장미의 이름으로 강렬하게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다. 모든 생명의 기운이 충만해 있는 이 때 악의 기운도 뻗치는 것일까.

동족상잔의 민족적 최대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느덧 55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군사적 긴장과 전쟁 재발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남북을 합쳐 약 170만 명의 병력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그 두터운 장막에 가로막혀 삶의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대신 영영 불귀(不歸)의 몸이 되어 눈물로 삶을 지탱해온 인생이 있다.

김덕순(70세) 할머니의 고향은 명태잡이로 유명한 함경남도 신포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던 해,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할머니는 5남매를 둔 부모님이 자식이 없던 친척에게 자신을 수양딸로 보내 수양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급히 짐을 꾸려 수양어머니와 단 둘이 피난길에 올랐지만, 수양어머니는 1·4후퇴 때 병으로 몸져누워 결국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김덕순 할머니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남한 땅에서 그야말로 혼자밖에 없는 외돌토리가 되고 말았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통에 16세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피난민들에 떠밀려 다니면서 거지와 다름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히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게 되어, 식모살이라도 하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아버지 친구 분이 저를 조용히 따로 부르시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시더라구요. ‘세상도 어지럽고 군인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니, 여자 혼자 몸으로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도 밥은 굶으면 안 되니까 안정된 곳으로 시집을 가는 게 어떻겠느냐.’ 하시는데, 오싹한 기분에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더군요. 그렇게 나이가 지긋한 분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수십 년의 나이 차이에도 정붙이며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저 하늘이 무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따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아들이 기침을 심하게 하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대로 아들마저 저승으로 보내는가 싶어, 다급하게 아들을 들쳐 업고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아들의 폐와 심장이 선천적으로 작고 약해 평생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현재 50세인 아들은 이후로 학교와 직장도 다니지 못한 채 시한부와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아들의 몸은 점점 나빠져 갔다. 게다가 세상살이를 비관해 술을 찾는 횟수가 늘다보니 알코올성 간경화와 결핵성 늑막염까지 앓게 되어 집보다는 병원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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