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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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1
  • 관리자
  • 승인 2007.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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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석/ 관응 큰스님

중생 삶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생명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살아가는 데 고생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의 목적이 고생을 떼어내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 한마디로 한문 문자로 쓰면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생명의 최고 목적이 고생을 멀리하고, 즐거움을 많이 누려보려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장터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돈은 무엇 때문에 버느냐고 물으면, 지금은 가난해서 고생하고 있지만 돈 좀 많이 벌어서 고생하지 않고 생활을 윤택하게 해서 즐겁게 살려고 하는 거라고 답합니다. 결국 학문을 하는 것이나 지위를 가지려는 것이나 최고의 목적이 이고득락입니다. 그럼 이고득락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불교에서는 무엇이든지 그 본바탕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전미개오(轉迷開悟)라 합니다. 모르는 것을 궁글려서 아는 것을 연다, 깨달음을 연다는 것이지요. 이고득락을 옳게 하려면 전미개오를 해야 하고, 전미개오를 하려면, 지악작선(止惡作善), 악한 것은 그치고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고생에서 벗어나는 길
고생이라는 열매(결과)가 나무 끝에 달려 있다면 어떤 것(원인)이 자라나서 꽃이 피고 열매가 되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전부 고생의 원인을 몰라요. 그 바탕이 무엇인가 알아야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원인조차 모르고 있으니 답답한 일 아닙니까.
원인을 알면 풀 수 있는 행을 하게 되고 그러면 고생은 없어지고 낙이 생길텐데, 우리는 아직도 생명체가 어떻게 된 것인 줄 깨닫지 못했어요.
여러분, 숨을 어떻게 쉬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숨쉬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숨쉬는 자리가 몸 속에 들어 있지요. 그게 눈에 가면 보이고, 귀에 가면 들리고, 코에 가면 냄새를 맡고, 입에 가면 맛을 알고, 몸으로 가면 느끼고, 뜻으로 가면 좋다 나쁘다 판단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것을 육근(六根)이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뱃속에는 오장육부가 있어요. 폐는 숨쉬는 작용을 하고, 위장은 움직여서 소화를 시킵니다. 또 우리가 먹은 음식물이 피를 만듭니다. 희한하잖아요.
어쨌든 고생이 뭔지 몰라서 문제지 제대로만 알면, 우리가 이 몸뚱이 작용하는 것만 다 알아도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컵에 물이 담겨 있는데, 수소와 산소가 조합되면 물이 된다고 합니다. 그럼 이것을 왜 알아내야 하느냐, 물의 본바탕이 뭔지 알아내야, 어떻게 하면 우리 생활에서 이익이 되고 어떻게 하면 해가 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밖의 것은 온갖 것을 다 알아냅니다. 밖의 것을 자꾸 구해다가 좋은 것만 보려 하고, 좋은 것만 들으려 하고, 좋은 냄새만 맡으려 하고, 좋은 음식만 떠 넣으려고 하고, 좋은 옷을 입히려고 합니다. 하지만 백년을 해봐도 이 속에서 “이만하면 됐다, 그만 하라.”는 얘기 안 나옵니다. 욕구라는 것이 땅에서 샘물 솟듯이 속에서 나온 것이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밖으로 자꾸 구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바탕은 어떻게 되었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런 작용이 나오느냐? 어째서 숨을 쉬고 어째서 음식을 삭이느냐? 이게 다 생명이 하는 짓인데, 그것을 모두 몰라요. 생명을 취급하는 의사들도 이 내용을 모릅니다.
옛날 중국에 주무왕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왕의 아들인데, 문왕이 다스리던 나라는 중국 서쪽의 제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 초상도 치르기 전에 중국 천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 때는 원나라 말년인지라 황제가 정치를 잘 못해서 백성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무왕이 대의명분을 가지고 인근의 800제후와 힘을 합쳐 쳐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한 명 따라오다가 선물을 하나 주면서, 사람처럼 만든 인형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따라 마시기도 하고 벙긋벙긋 웃고 하는 짓이 영락없이 사람인데 인형이라고 하자, 무왕이 “사람인 것 같은데 왜 인형이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인형이라는 증거를 대겠다며 그 사람 같은 인형을 끌어다가 한 꺼풀 거죽을 벗기자, 짚풀 등으로 만든 속이 나오는 겁니다. 붙이니까 사람이 되고 떼어놓으니까 잡동사니가 나오는 거예요. 이 얘기가 우스운 소리처럼 느껴질는지도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말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생명의 이치, 생명의 작용을 100퍼센트 다 안다면 어머니 뱃속을 빌리지 않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사람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실상을 모르고 그저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저 인형이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것과 똑같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
부처님을 인도말로 붓다라고 합니다. 깨달은 사람, 각자(覺者)를 뜻하는데, 그럼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느냐? 생명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하는 짓을 모두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 속에 생명이 하나씩 들어 있다고 하지 않았는데, 생명의 이치를 전혀 모르는 우리들은 이 몸뚱이를 생명으로 알고 즐거움을 누리려는 욕심만 잔뜩 차 있습니다.
옛날 삼천 년 전에는 뱃속의 오장육부 중 심장에서 생각이 나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머리 속의 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이 이 몸뚱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 되고, 그렇게 되면 명태는 명태 속에서 생각이 나오고 파리는 파리 속에서 생각이 나오겠네요. 하지만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곧바로 설하신 것이 화엄경입니다.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할 때 과거 현재 미래에 통하여 도장 찍듯이 설하신 그 깨달음의 세계를 해인삼매라고 합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칠산 팔해가 있는데, 일곱 가지 향물로 된 바닷물에 한꺼번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삼라만상이 다 비치는데 도장 찍은 것같이 역력하다는 겁니다. 깨닫고 나면 지구 만 억 개를 가루로 내서 만든 수보다 많다는 법계의 낱낱 중생의 본말이 한꺼번에 도장 찍듯이 보인다는 겁니다. 백억만년 전에는 뭐였고 미래에는 뭐가 될 것인지 일체 중생의 인과응보를 다 안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되면 시간과 공간이 없어져요. 일체 생명을 가진 것뿐만 아니라 세상 물건의 본말 시종을 다 알아요. 이 컵이 어디서 만들었는지도 알고, 컵이 언제 깨질 건지도 다 알고, 또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성이 무엇인지 앞으로 뭐가 될 것인지 연관지어서 다 압니다. 또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 어느 부처님은 어디서 어떻게 닦아서 부처가 되고, 부처가 된 다음에 첫째는 누구를 제도하고, 둘째는 누구를 제도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제도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다 아느냐, 우리 생명의 본질을 깨닫고 나니까 다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닫지를 못해서 생명에 대한 지식이 없어 숨을 쉬면서도 숨이 어떻게 쉬어지는지 몰라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이게 다 생명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일체 생명이 똑같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니 생명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거예요. 생명은 청정법신비로자나불, 하나뿐이라는 겁니다.
생명을 깨달으면 하나인 부처가 되는데, 생명을 깨닫지 못해서 차등이 생겨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고 고기도 되고 새도 되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평등이고, 깨닫지 못하면 차별이 된다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입니다.
여러 종교 중에서 오직 불교에서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생명은 하나인데, 깨닫지 못한 우리는 생명 전체를 못 봅니다. 눈은 보는 것밖에 못하고 귀는 듣는 것밖에 못해요. 하나인 생명에서 안으로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생기고, 밖으로는 육진이 생깁니다. 그래서 제각각 내 몸뚱이 속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주 불쌍하게 된 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을 깨트리는 겁니다. 이것을 깨뜨리면 하나로 보이는 것이고, 이놈이 있으면 차별이 생기는 거예요. 고기는 고기대로 새는 새대로 하나의 생명 속에서 깨닫지 못한 탈인 십팔계를 쓰고 앉아 있으니 내 생명이 내 몸뚱이 속에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것 하나 깨트려주려고 오신 겁니다. 법화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부처님의 지견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지견은 생명을 하나로 보는 것이고, 중생의 지견은 생명을 여러 가지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우리가 생명에 대해서 아느냐 모르느냐 자기 자신을 점검해보세요. 모르면 저 날아다니는 파리나 우리나 같습니다. 장자에 그런 얘기가 있더군요. 목장에서 염소를 기르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이는 바둑에 팔려서, 한 이는 글 읽다 염소를 잃어버렸어요. 사람들은 글 읽다 염소를 잃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둘 다 똑같아요. 사람이 되었거나 파리가 되었거나 자기 생명에 대해 모르는 것은 똑 같아요.
법화경 첫 장을 열면 부처님이 백호광명으로 동방 만팔천 세계를 비췄다고 했어요. 그리고 어떤 이는 보시를 잘 했다, 어떤 이는 지계를 잘했다는 등 과거에 했던 것, 미래에 했던 것이 다 보인다고 법화경 서품에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생명의 본질을 깨달아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뚱아리에 의지하는 것밖에 모릅니다. 생명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몸뚱아리에 매여 있으니까 고생이 붙어있다는 말입니다. 본성을 깨닫기 전에는 온갖 고생이 붙어 있는데 그것을 깨달으니까 고생이 도망가버렸습니다. 깨달은 부처님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는 그것뿐입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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