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나의 병도 없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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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나의 병도 없어지리라
  • 관리자
  • 승인 2007.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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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스님의 은혜를생각하며

서울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에서 광덕 스님을 처음 친견했을 때 제 나이는 스물셋이었고, 스님의 나이는 30세 정도의 젊은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대각사 주지이신 소천 스님께서 지식인들을 위한 금강경 강의를 하실 때였고, 광덕 스님께서는 금강경 강의에 동참한 소중한 인연들을 이어가시며 부처님 말씀을 연구하시면서 대각회 창립의 뜻을 세우셨습니다. 산중불교를 대중불교로, 기복신앙을 정법불교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대각회를 창립하시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저는 불교에 처음 입문한 초년생이어서 동참하지 못하였고 몇 년이 지나서야 스님께서 보현보살님의 원력으로 그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가뜩이나 가난하던 차에 비참한 6·25전쟁까지 겪고 난 지 겨우 3년이 조금 지난 때인지라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대각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생활의 기본인 식량의 보급조차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그 어려운 사정을 보시고 콩이라도 사서 보태시라고 당신의 여비 일부를 주지스님께 드리던 일이 엊그제같이 눈에 선합니다.

평소에도 스님의 특출하신 지식과 지혜를 몹시 부러워했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시는 스님을 존경하던 차에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은 저에게 새로운 신심과 용기가 되었고, 게으른 제 수행생활에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몇 년 뒤에 들어서 안 일이지만 스님께서는 그 시절에 유행하던 폐결핵으로 인하여 굴껍질과 계란껍질을 갈아서 약 대신 잡수셨다고 합니다. 그토록 병약한 중에도 언제나 책을 읽으셨으며, 하실 일이 생기면 당신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피하시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제가 대각사를 떠나서 허약한 몸으로 정처가 없을 때에는 울산 문수암에 있도록 인도하여 주셨고, 병세가 악화되어 문수암에서 업혀 내려와서 스님께서 주석하시는 기장포교당에서 6개월 이상이나 누워있을 때에도 바쁘신 스님께서는 밤을 지새며 저를 간호하여 주셨습니다.

그 때 스님께서 해주신 여러 가지 말씀 중에 앞으로는 거사불교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사가 허망하다고 하여 출세간에 치우치거나 형식의 틀에 얽매여 있거나 혹은 하향식 불교가 아닌 불교의 일반화와 실재적인 생활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하게 침묵하며 정적(靜寂)을 지키는 불교가 아니고 활기차게 일을 하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46년 전에 말씀하신 거사불교는 곧 보살행으로,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 현대화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1974년 월간 「불광」을 창간하시고 그 다음해 불광법회를 창립하시면서 지난 날 말씀하셨던 생동하는 불교, 활기찬 불교의 대중화와 마하반야바라밀의 밝은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지금보다 의술이 훨씬 열악했던 30여 년 전 스님께서는 위장의 3분의 2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입원치료비를 절약하시기 위하여 병원에 오래 계시지 않고 퇴원하여 안양에서 회복기를 보내시면서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이 심할 때에도 보살행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스님은 “일체 중생에게 병이 없어지면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신 유마 거사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통증을 감내하셨습니다.

수술 뒤의 후유증이 심하여 위장상태가 극도로 쇠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영양보충은 고사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연탄불에 겨우 익힌 솜씨도 없고 맛도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때로는 연탄불이 제대로 피지 않아 화력이 부족한 관계로 인하여 국수가 10가닥씩 서로 엉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죽이 된 국수를 드시게 하였던 일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하기 한량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병약하시어 피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제 은사이신 소천 스님에 관해 제가 모르고 있던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동족상잔의 비참한 남북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전쟁을 속히 끝내고 평화를 회복하시고자 소천 스님과 함께 마산에서 이절 저절 이집 저집을 정처없이 바꿔가시며 구국원력모임을 만드시어 금강경독송 정진불사를 하시는 한편, 금강경과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번역하셨던 일, 소천 스님께서 김좌진 장군 부대에서 재무참모로 독립군의 모병 등의 일을 하셨고, 청산리 전투에서 겪으셨던 급박한 상황들, 범어사 금강암에서 매일 옷을 갈아입으시며 백일씩 세 번이나 기도를 하셨던 일, 소천 스님께서 56세의 만년에 승려가 되신 일 등등, 연세도 많으시고 오랫동안의 병마로 인하여 허약하셨지만 지난 날의 일들을 너무나 생생하고도 자세하게 말씀하여 주시는 기억력에 크게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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