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활약한 우리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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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활약한 우리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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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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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사 (18 )/신라편

  최초로 불사리를 전해 온 각덕 (覺德) 스님

 신라 제24대 진흥왕 (眞興王) 10년 (549) 의 어느 화창한 봄날에 서울 (지금 경주) 성 안에는 큰 경사라도 난듯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 (興輪寺) 앞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미 그 길에는 조정의 백관 (百官) 들이 왕명을 받들어 귀한 나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와서 길 양편에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실은 나라의 귀한 손님 (國賓) 보다도 더 존귀하고 신성한 부처님의 사리 (佛舍利 ) 를 받들어 모시고 오는 양 (梁) 나라의 사신 일행 (使節團 ) 을 환영코자 함이었다. 그 양나라 사신의 일행 중에는 신라 스님 한 사람도 함께 끼어 있었다. 그가 바로 신라에서 처음으로 양나라에 가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각덕스님이었다.

 신라로서는 참으로 경사스럽고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게 되고 또 첫 구법승 (求法僧) 을 맞이하게 되었으므로, 나라의 경사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라가 불교를 국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은 상당히 오랜 시일과 많은 곡절을 겪고 나서의 일이었다. 제23대 법흥왕 (法興王) 14년 (527) 에 왕의 당질 (當姪) 이었던 이차돈 (異次頓) 의 숭고한 순교 (殉敎) 의 흰 피가 솟은 (白乳通出) 뒤에 비로소 신라는 불교를 온 나라 사람이 자유로히 신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불법 (佛法) 을 일으키게 된 법흥왕은 그 22년 (535) 에 대궐의 서쪽 쇠내다리 (西川橋, 즉 金橋) 동쪽의 천경림 (天鏡林) 에다 큰 절을 세우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 절이 곧 흥륜사이다. 절 짓는 공사의 일부가 이루어지자 법흥왕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그 흥륜사에 살면서 나라 다스리는 일도 함께 겸하였다. 그때 왕후 보도(寶刀) 부인도 흥륜사 건너편 삼천기 (三川岐)에 영흥사 (永興寺)를 세우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묘법 (妙法) 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법흥왕이 그 27년 (540) 에 세상을 떠나자 7 세의 삼맥종 (三麥宗) 이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법흥왕의 조카이며 외손자인 삼맥종 (深麥夫 라고도 하였음 ) 이 바로 진흥왕 (眞興王) 인데, 그가 어렸으므로 태후 (太后) 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왕태후라고 하여 있으므로 왕태후는 전왕의 왕후이니, 어린 진흥왕을 도와 섭정한 태후는 곧 전왕인 법흥왕의 왕후보도부인이 된다. 그 왕후는 남편 법흥왕의 뒤를 이어 출가하고 영흥사에 살면서 묘법이라 이름하는 비구니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영흥사의 비구니 묘법스님이 왕태후로서 어린 왕을 섭정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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