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비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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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자금
  • 관리자
  • 승인 2007.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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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당신, 내 지갑 못 봤어?”

박만호 씨가 아내를 흔들어 깨우며 물었다.

“지갑? 양복에 없수?”

남편을 기다리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잠이 든 무심행 보살이 겨우 눈을 뜨며 되물었다.

“없어. 분명히 안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또 시작이유? 어쩐지 이번엔 오래 간다 했드니….”

맥이 탁 풀어진 무심행이 남편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며 대꾸를 했다.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눈자위가 퀭했고 턱수염이 유난히 덥수룩해 보였다. 그런 남편이 늦게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번엔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긴 박만호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소지품 잃어버리기 선수였다. 일년에 적어도 서너 차례 이상은 지갑이나 가방, 책 등을 잃어버리거나 소매치기를 당했다. 언젠가는 보름 간격으로 지갑을 분실해 현금카드와 신용카드를 갱신하러 갔더니 동생뻘쯤 되는 담당 직원이 새 카드를 건네주며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아저씨, 이 카드에다 구멍 뚫어 드릴까요? 아예 목걸이처럼 걸구 다니시게요.”

그런 망신까지 감수하며 다시 카드를 발급받을 때만 해도 박씨는 여러 장의 신용카드에 상당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개 월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 뒤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별다른 쓸모는 없어도 카드로 채워진 지갑은 적잖은 위안과 용기를 주는 게 사실이었다. 한때는 그런 카드들이 신분 과시용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잃어버렸을 때의 번거로운 분실 신고 절차는 물론 불안한 마음 때문에 적어도 서너 달 이상 후유증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박씨가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덕택이었는지 약간의 비상금과 명함만으로 채워진, 박씨의 얄팍한 새 지갑은 좀처럼 그의 수중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약간 달랐다.

“자네들 한 해 동안 고생 많이 했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특별 상여금이다 생각하구 받아 두게.” 송년회를 겸해 회식이 시작될 무렵 그가 받은 상여금 봉투 속에는 십만 원 권 수표 세 장과 현금 이십 만 원이 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예년에 받던 정기 상여금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돈이었다. 그가 일 년에 다섯 차례에 걸쳐 받던 상여금은 지난 한 해 동안 단 한 번도 지급된 바 없었다. 아내인 무심행도 월급이나 깎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상여금은 엄두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알토란 같은 돈이 생긴 박씨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것저것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밀린 자동차 할부금을 갚을 것인지, 십 년이 넘도록 사용하다 고장이 난 비디오 레코더를 새 것으로 바꿀 것인지, 아니면 눈 딱 감고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내 몰래 비자금으로 착복할 것인지….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비자금 쪽이었다. 몰래 숨겨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 큰소리를 쳐보는 것이다. 그 순간 눈을 화들짝 뜬 채 환호성을 지를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우쭐해졌다.

그런데 그 비장의 카드를 뽑기는커녕 있는 지갑마저 잃어버린 게 아닌가.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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