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고불(趙州古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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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고불(趙州古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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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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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그늘/한송(漢松) 스님

나는 중국의 조주(趙州) 스님을 특별히 좋아한다. 조주 스님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동기는 매우 단순하다. 선문(禪門)에서 말하듯이 조주 스님의 종풍(宗風)과 선기(禪機)가 육조혜능(六祖慧能)이 일으킨 남종선(南宗禪)을 크게 진작해서 일세를 풍미하였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친숙해진 ‘무(無)’자 화두나 ‘끽다거(喫茶去)’의 기략(機略) 때문도 아니다. 1백 20세를 산 생애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 산 것을 특별히 존경하는 것도 아니다. 1백 20세를 산 생애에 있을 수 있는 극적인 사건들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내가 조주 스님을 좋아하는 것은 1백20년의 긴 생애가 단순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조주 스님의 1백20년의 오랜 생애는 네 개의 토막으로 나누어지는 단순한 생애이다. 1백 20년을 살았음에도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이 생애가 나에게 감명을 주었다.

내가 조주 스님의 생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파계사(把溪寺)의 조실(祖室) 한송(漢松) 스님 때문이었다.

나의 은사(恩師)이신 금오(金烏) 스님께서 총무원장직을 내놓으시고 산사(山寺)로 돌아가실 때 함께 가기를 원하셨으나 나는 함께 가지 않았다. 스님과 함께 가면 절의 소임(所任)을 맡아야 할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 무렵은 지금과 달라서 절의 소임을 맡을만한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소임 맡기를 꺼리는 때였다.

설사 소임을 맡지 않고 선방(禪房)에서 참선만 한다 해도 은사스님을 모시고 지내는 것이 부자유스럽고 구속감(拘束感)을 줄 것이므로 그것 또한 싫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스님 앞으로 출가해서 제자가 되었으면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임에도 그렇지 못한 것은 나의 불찰이고 불효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이 불효한 제자가 스님을 떠나 파계사로 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스님께서 한송 스님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써 주시면서 전하라 하셨다.

파계사에 도착해서 한송 스님에게 스님의 글을 전하였다. 편지를 읽으신 한송 스님, 나를 지긋이 건너다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훌륭한 스님을 두었으니 찬수좌(燦首座)는 복인(福人)이다.” 하셨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한송 스님께서 편지를 건네 주시면서 읽어보라 하셨다.

지금 글을 그대로 기억할 수는 없으나 “기륜증미전(機輪曾未轉)이나 전필양두주(轉必兩頭走)라 기내천성영기(機乃千聖靈機)요, 윤시종본기래제인명맥(輪是從本己來諸人命脈)이로다”라고 한 벽암록(碧巖錄) 65측의 평창(評唱)을 인용하신 것은 기억을 한다.

우리 말로 옮기면, “기륜(機輪)은 아직 구르지 않고 있으나 구르기만 하면 반드시 양두(兩頭)에 질주할 것이다. 기(機)는 곧 천성(千聖)의 영기(靈機)요, 윤(輪)은 본래 모든 사람의 명맥(命脈)이니라.”이다. 읽고 난 나에게 한송 스님께서 스님이 이 글을 인용하신 뜻을 아는가 물으셨다. 나는 제 은사스님께서 저를 과찬하고 계시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가슴에 뜨거운 것을 느꼈다. 당신 곁을 떠나 다른 스님의 밑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불효한 제자를 위해서 간곡한 부탁과 함께 제자에 대한 기대를 이 평창을 인용해서 피력하신 스님의 마음이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이다.

그 때, 한송 스님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가 강원을 가거나 선방에 가게 되면 은사스님이 강백(講伯)이나 조실에게 편지를 쓰거나 함께 찾아가서 제자를 부탁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는 은사스님도 없고 사미계만 받으면 혼자서 목적없이 떠도는 풍조가 생겨서 걱정이라 하셨다. 그런데 나의 은사스님께서는 간곡한 글을 보내셨으니 참으로 생각이 깊으시고 또 그러한 스님을 두었으니 남다른 복이 아닌가 하셨다. 그리고 조주고불(趙州古佛)이 고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은사스님이 제자를 위해서 스승을 찾아 준 덕택이다 하시고 조주를 배우면 그러한 은사스님의 믿음을 갚게 될 것이다 하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조주 스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주 스님은 당(唐)나라 말엽의 종심(從심, 778~897) 선사를 가리킨다. 그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조주(趙州)에 있는 관음원(觀音院)에 40년 동안 주석(住錫)하면서 승속(僧俗)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조주’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조주 스님은 어려서 그가 태어난 고장에 있는 호통원(扈通院 혹은 龍興寺)에서 출가하였다. 그때의 승명(僧名)이 종심이다. 종심의 머리를 깎아준 은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뒷날, 선(禪)의 거장(巨匠)이 된 조주 선사의 은사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無名)이라면, 요즘 말로 해서 ‘큰스님’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큰스님은 아니지만 그 은사스님에게는 장차 거목(巨木)이 될 제자의 자질을 알아보는 안목(眼目)과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

종심이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 아직 사미(沙彌)로 있을 때였다. 이 무명의 은사스님은 제자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주기 위해서 제자를 데리고 제방(諸方)의 선지식을 찾아 행각(行脚)을 나섰다.

이들은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선지식을 찾은 끝에 지주(池州)에 이르러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 화상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종심의 나이는 14세 가량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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