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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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양보
  • 관리자
  • 승인 2007.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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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회향하는 삶

“IMF시대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요즈음 흔히 듣는 말이다. 나는 불교공부를 했노라고 누구한테도 얘기하거나 자랑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비웠느니, 어느 경지에 간 것 같다느니….’하는 말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한번도 비워본 일이 없고 누굴위해 내 자신을 희생했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나는 나이기에….’ ‘나’라는 기준이 자연적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호흡하며 살아가는 만물(萬物)은 각기 ‘스스로의 기준’에 빠지기 마련인데 자기 집착의 강약이 결국 업력(業力)이 되고 있는 것이다.
‘회향하는 마음.’
이게 사실 ‘회향’하는 게 아닌데…. 어려운 과제다. 누굴 위해 회향하는 마음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도 아닌 것,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일체에 ‘회향’하는 것인데….
‘나’를 위해서거나 ‘남’을 위해서 ‘회향’했다거나 ‘좋은 일’을 했다는 마음이 인지되었을 때 그것은 회향이 아니라는 부처님 말씀이 금강경에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회향하는 것-그것은 진정한 회향이 아니다. 즉 이것으로 남을 돕고 저것은 아껴두자거나 꼭 누굴 돕는 것이 아니라도 남을 의식하여 고민하고 비방하며 얼굴 찌푸리면 그것은 회향이 아니라 ‘상거래’다.
진정한 회향은 ‘회향’을 ‘회향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 모두(일체)의 일에 절대 안달하지 않게 된 것이 진정한 회향이다.
‘나(我)’라는 착(着)에 빠져있는 이상 회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고, 불교공부 문턱에 가보지 않은 일반인(타종교 포함)도 수행이 따르지 않고 입으로만 주워 섬기는 것을 알아 차리고 있다.
진정한 회향인은 부처님 진리를 전달한다거나 그에게 이익이 될 것을 해준다거나 하는 생각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게 되며, 아주 작고 미세하나마 행동에 나타나고 얼굴과 언어구사에 자연스레 배어나는데 막상 그 장본인은 모른다. 그런 생각을 전혀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쉽게 말해서 5계를 지키는 것도 회향이고, 겸손한 것, 스승을 찾거나 참배하는 것도 회향이 아니고 무엇이랴?
꼭 나이 많은 인물만이 스승이 아니고 나이가 어리거나 부딪치는 세상일들에서 우리가 겸허히 받아들여 배워야 할 것을 찾아내는 것-그것도 분명 회향인 것이다. 내가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마음먹은 일은 남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바뀌었다. 내 마음 속의 일을 선지식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부처님 경전을 독송하고, 스승을 찾으며, 부처님 형상에 참배하는 것이 마음 밖으로 나타나 일체에 인지되고 스스로에게 회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병명없이 아프던 아내는 절에 열심히 매달리자 씻은 듯이 나았는데 가정살림이 소홀해지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그날도 말다툼을 크게 하고 잠이 들었다.
집채만한 신장님이 나타나 내 등을 밟아 숨이 끊어졌는데 단 사흘 만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애걸 복걸하다가 잠을 깼다. 어찌나 억울하고 허무하던지, 꿈 속에서나마 무상(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내 생명의 기한은 단 사흘이라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는데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은 무조건 양보, 무조건 용서였다.
전에는 어려운 발음의 ‘다라니’를 스쳐보고 비아냥거렸다. 아내를 나무라고 핀잔하며 머릴 깎고 등떠밀던 행동이 변했다. 무조건은 일체와 통한다. ‘나’를 포함한 일체이기에 모두를 용서하는 것은 ‘나’를 용서하는 것이 되고, 모두에게 양보하는 것도 ‘나’ 스스로에 양보하는 것이 되더라 이런 이야기이다.
처음에 웃었던 ‘다라니’를 외우고 한글대장경을 읽고 금강경 원전을 스승을 찾아가 배우게 되니 법우를 만나게 되고, 선지식과 접촉하여 이상경지(異狀境地)를 점검받기에 이르렀다.
술·담배가 입에서 떨어져나가고, 남을 질시하고 고집스런 행동이 경전을 읽을 때마다 수없이 솟는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티를 안 내려고 벽과 천정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니, 달아오른 얼굴, 코막힘, 어눌해진 언어에 아내는 감기약 사오겠다 하고, 아이들은 또 술마셨냐고 반문했다.
내 스스로는 어느 만큼이나 변해가고 있는지 가늠해볼 도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추구해온 욕심 일변도에서 삼독심이 얼마나 삭아졌을까?
그러던 어느 날 경전을 한 바늘에 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바꾸어 말하면 지내온 내 인생 전반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그후 내 입에서 쏟아지는 폭포수와 같은 말을 듣고 주위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불경(佛經)이나 인생문제를 꼬집어 다룬 것이 아니었는데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았었는지 모르겠다. 부처님 말씀이 내 인생에 비추어져 희열에 터져나온 환희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입장에서 평하거나 논한 것이 아님을 이미 그들은 알아차리고 있었고 내가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자신을 해(害)하려 한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에 나는 나대로 탄복하고 있었다.
또한 진리를 전달한다거나 그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해본적이 없다. 내 뜻에 반(反)하건, 동조하건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며 내 말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위 사람들의 눈빛에서 나는 신이 났었던 것 같다.

“IMF시대에 어떤 마음으로 사는가 ?”
“돈을 잃어버린 마음도 아니고, 돈을 줏는 마음도 아닌… 마음으로 삽니다.”
“자네에게 맞는 말일세.”
스승의 큰 칭찬에 나는 또 ‘제행무상’을 단 한 번에 일깨워 주신 불보살님을 떠올린다.
내 생명의 남은 기간은 단 사흘인데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일체(모두)에 양보, 일체에 용서, 일체에 회향하는 것이다.
사실은…. 전부 같은 말뜻인데….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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