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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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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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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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그늘/ 지원(知圓) 스님

정화(淨化) 때였다.

부산 선암사의 선방(禪房) 대중 가운데 지원(知圓) 스님이 계셨다. 아마 그때, 스님의 나이는 60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스님은 동진출가(童眞出家)하였다고도 하고, 한 때는 금강산에 효봉(曉峰) 스님과 함께 수행을 하였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수행을 하였을 것임에도 선객(禪客)들 사이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무명(無名)의 선사(禪師)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은 8·15광복 후에 중국에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스님은 ‘중국 스님’이라는 호칭으로도 통했다.

그런데 이 호칭에는 스님을 깎아내리고 업수이 여기는 정서가 담겨 있었다. 주로 젊은 수좌들 사이에 그러한 정서가 강하였다. 그래서 젊은 수좌들은 스님을 즐겨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젊은 수좌들의 그러한 정서는 중국인을 폄훼(貶毁)하는 보통 한국인의 정서탓도 있지만, 스님 스스로 위화감을 조성해서 자초한 면도 있었다.

우선 스님은 복장부터가 달랐다. 검은 색의 중국 승복(僧服)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스님들과 확연히 구별이 되었다.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곳에서 혼자만이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은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한국 승복을 입기를 권해도 “겉모양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수행하는 사람은 속(정신)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은 세탁을 해서 말리는 중국 승복을 어느 짓궂은 수좌가 감추었다. 뒤에 옷을 감춘 수좌는 스님에게 참회를 하였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스님의 복장이 정식으로 대중공사(大衆公事)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였다.

또 다른 것은 스님이 메고 다니는 ‘고리’와 ‘선탑(禪榻)’이었다. 「선원청규(禪苑淸規)」에 보면 ‘고리’를 ‘행리(行李)’라 했고 여행을 하거나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는 스님이 필요한 물건을 넣는 궤짝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한국 스님들이 메고 다니는 걸망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양은 네모진 상자로서 대오리로 엮었고 겉은 검은 천으로 쌌다. 이 고리가 눈에 설기도 하지만 고리에다 비끌어 매서 고리와 함께 메고 다니는 선탑은 수좌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물건이었다.

선탑(禪榻)은 선상(禪床)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선원에서 좌선(坐禪)을 할 때 앉는 긴 의자다. 대중이 선당(禪堂)에 모여서 좌선을 할 때, 지정된 자리에 이 선탑을 깔고 앉아서 참선을 하므로 그 지정된 자리를 선탑 혹은 선상이라고도 한다. 스님의 선탑은 두 다리를 뻗고 앉을 만한 크기로 높이는 30cm나 될까, 등나무로 엮은 것이었다. 스님은 이 등나무 선탑이 자랑이었다. 대오리를 엮어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등나무로 만든 것은 고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이 선탑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다. 이것 또한 수좌들의 비위를 건드렸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 그 위에 앉아서 참선하는 것은 볼썽이 사납다는 것이다. 중국의 절은 법당이든 선당이든 바닥이 우리와 같이 마루가 깔리거나 온돌방이 아니라 흙을 구워서 만든 전(塼)이라고 하는 벽돌을 깔았으므로 잠을 자기 위해서는 침상(寢床)이 있어야 하고 앉아서 참선을 하려면 선탑이 있어야 하지만 한국의 선방에서는 도무지 그러한 것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선탑을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딱했다. 물론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 온 선탑에 대한 애착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애착을 버리는 것을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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