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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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의 여자
  • 관리자
  • 승인 200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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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인후는 알이 큰 짙은 선그라스를 코 위로 밀어 올리고 다시 점퍼 주머니에 든 하모니카를 만지작거렸다. 늘 그렇지만 하모니카를 만지고 있으면 웬지 가슴이 푸근해졌다. 두 옥타브도 채 들어 있지 않은 작은 하모니카는 인후의 손바닥 안에서 벌써 이십여 년째 머물고 있었다. 한 물건과 더불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게 인후는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서른셋이었고 여전히 하모니카는 그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서양의 어떤 장인이 만들었을 이 물건은 아래 위로 나무를 댄 앙증맞은 모양이었는데 정교하게 조각된 두 마리의 고양이가 각각 양쪽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약간 붉은 빛이 도는 나무는 인후의 손때에 절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구석에 긁힌 자국과 더불어 USA라는 표기가 있었다.

그녀가 이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이십 년 전 낙산 허리의 옛 성터에 자리한 국민학교. 교정 한켠의 등나무 아래 엉성한 장의자가 몇 개 있었다. 그리고 거기 앉아서 그녀는 이 하모니카를 불곤 했는데 참으로 멋진 솜씨였다. 음의 장단과 고저를 체득한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녀는 악보도 없이 곡명만 대면 어떠한 곡이든 척척 불어 댔다. 그녀의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후는 저도 모르게 가슴 저 아래에서 뭔지 모를 슬픔의 알갱이들이 비누거품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녀 이름은 은주였다. 인후는 그녀의 하모니카 소리와 더불어 소년시대의 그 어지럼증나는 시절을 가슴 조이며 보냈다. 난생 처음으로 한 타인의 존재가, 이성으로서의 존재가 소년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인후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와 눈빛이라도 마주치라치면 화들짝 놀라 먼저 눈을 돌리곤 했다. 그녀의 푸른 빛이 도는 눈을 단 십 초만 그대로 바라본다면 인후는 괜히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인후는 늘 그녀의 배경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 드러나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그렇게 숨어서 지켜보고만 싶었다. 이제는 드러나도 그녀 쪽에서 알아보지 못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인후는 여전히 그녀의 뒤에 머물러 있었다. 오랜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열세 살의 여름, 그 때 인후는 저수지 옆 언덕에서 친구들과 연을 날리고 있었다. 은주는 제 오빠와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강태공 흉내를 내고 있었다. 인후의 가오리연은 제법 높이까지 올라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인후는 작은 점처럼 보이는 가오리연보다는 은주의 뒷모습에 더 관심이 있는 터여서, 그리고 실핏줄이 드러나는 그녀의 흰 종아리와 햇빛에 빛나는 무릎 언저리를 힐끔힐끔 훔쳐보는 게 더욱 감미로운 것이었다. 그녀의 무릎은 어떻게 그런 신비감으로 빛이 나는지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마저 아득해지곤 했다.

그러던 그날, 은주의 오빠가 '앗, 월척이다'라고 외쳤다 낚싯줄이 얼레에서 푸르르 풀려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아이들은 모두 하늘로 간 시선을 저수지로 돌렸다. 인후도 역시 돌아보았다. 그 때 '줄이 모자라···' 하는 은주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은주가 갑자기 인후에게 달려들어 연줄을 확 낚아챘다. 은주는 연줄을 이로 물어 끊더니 그대로 낚시줄 끝에 이어 붙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자 연이 조금 치솟는 듯하더니 얼마쯤 이쪽으로 끌려왔다. 물 속의 고기가 잡아 당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연이 부 떠올랐다. 바람이 연을 당겨 그만큼 고기가 이쪽으로 끌려온 것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입을 헤벌리고 연과 고기의 줄다리기를 바라보았다. 고기가 당기면 연이 끌려오고 연이 솟아오르면 고기가 끌려오고···.

인후는 하모니카를 만지작거리며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먼 기억의 신기루가 엊그제 일인 양 눈 앞에 가물거렸다. 는개 같은 뿌연 습기가 기억의 덩어리를 감싸고 돌았다. 세월은 천천히 강물처럼 흘렀으나 뒤를 돌아보니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변하지 않은 건 오직 이 하모니카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게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특이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전혀 다른 이상한 무엇들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인후는 자신이 이 하모니카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여 훔치지 않았더라면 좀더 다른 방향으로,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이 하모니카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살지는 않았을 거라는, 그런 억지 같은 생각도 뒤따랐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책상 밑에 들어 있던 하모니카를 훔친 건 참 불행한 일이었다. 이 하모니카에는 어떠한 주술이 녹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십여 년 간 한 사람의 운명을 부여잡고 이런 식으로 꼼짝 못하게, 비틀거리게 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제 주인을 잃은 이 하모니카는 두 사람 모두에게 복수를 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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