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느 부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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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어느 부부 이야기
  • 관리자
  • 승인 2007.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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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아내는 여전히 울듯말듯 떨리는 목소리로 화를 삭이고 있었다. 명구 씨는 마치 아들 동주의 팔이 자기 때문에 부러지기라도 한 양 멍하니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동준의 팔을 부러뜨린 자장면 배달 소년은 몸져누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열다섯 살짜리 소년가장이었다. 올해 일곱 살인 동준은 그 소년이 타고 가던 자전거에 치여 왼쪽 손목이 부러졌던 것이다.

명구 씨는 물론 그 소년이 집에도 가 보았고 자장면 가게에도 가 보았다. 소년의 집은 B동 산기슭의 게딱지 같은 단칸 월세방이었다. 2월 찬바람이 살을 에이는 한겨울임에도 그 방엔 온기라곤 없었다. 낡은 전기 장판이 관절염에 찌든 한 여인의 등판을 간신히 데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여인은 이미 노파라고 해도 그만일 정도로 쇠해 있었다. 세상의 불행에는 익술할 대로 익숙해져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는 게 세상살이라고 여기는 그런 가여운 사람이었다. 명구 씨는 연신 머리를 조아려대는 그녀 앞에서 뭐라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물러나왔던 것이다.

자장면집도 꼴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그런 집이 남아 있었나 싶은 목조 건물 구석에 가건물로 붙은 두 평 남짓한 허름한 가게였다. 주인 사내는 석달이나 월세르 FAHT 냈다며 손을 비비기부터 했다. 치료비로 보낸 10만원중 7만원을 자신이 냈노라고 생색을 냈으나 그 말에서 연민을 느꼈을지언정 그 사내가 제 보상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명구 씨는 그 가게에서도 이렇다 할 항의조차 못하고 담배만 내리 석 대 피우고 물러나왔다.

아내는 그들의 사정이 어떻든 상관없이 독하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치료비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을 받고 물러난다면 우리만 바보 되는 거라고, 우리가 맹하게 구니까 우습게 보고 그따위로 얕보는 거라고, 아무리 없는 집이라도 경찰에 고발을 하겠다, 소송을 하겠다, 치료비 전액은 물론 위로금, 보상금, 합의금을 다 내놔라. 하고 독하게 나가면 적어도 충분한 치료비는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마도 동네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말을 듣고 더도 모르는 사이에 변호사 끄트머리자리 같은 소견을 익힌 모양이었다.

어쨌든 명구 씨는 아내가 전에 없이 그렇게 야멸찬 말을 쉽게 뱉는 걸 보고 쓸쓸하면서도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아내가 영 낯설어 보였던 것이다. 원래 아내는 뭐라고 거친 소리라도 한 마디 할라치면 먼저 누자위부터 그렁그렁해지는, 그런 갈데없는 유약한 여자였던 것이다.

동준은 깁스한 팔을 하고 초저녁부터 제 방에서 자고 있었다. 명구 씨는 아들 방쪽을 동아보고 천천히 일어나 거실 구석에 놓인 책상에 가 않았다. 내일까지 그려서 넘겨야 할 삽화가 아직 여러 장 남아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궁시렁거리던 아내는 기어이 울고 말았다.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당신 때문이에요. 그렇게 성인군자처럼 혼자 잘 나서…남들 다 이해해 주고 나면, 그러면…그러면 우린 뭐예요? 집 전세값도 없어서 대출 신청해 놓고…벌써 몇 달째 이 아프다며, 치과에도 못 가 놓고, 그런 형편에…."

아내는 그 대목에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명구 씨는 밑그림을 그리던 4B연필 끝에 저절로 힘이 받치는 걸 느꼈다. 연필심이 부러져 또르르 구른 소리가 들렸고, 뒤통수로 자르르 전기 같은 것이 흐르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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