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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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 관리자
  • 승인 2007.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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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원효성사

신라군 5만 병마가 예성강(禮成江)을 건너 고구려 영토로 진군하면서 고구려군의 저항을 몇 차례 받았으나 수백 명이 성을 지키고 있는 고구려군은 대군의 행렬이 한없이 이어지는 신 라군의 위용에 그만 기가 질린 듯 성문을 여는 곳이라곤 없었다.

신라군은 전군(前軍), 중군(中軍), 후군(後軍)으로 편성되었고 전군은 김유신 대장군이 화 랑소에서 몇 년씩 훈련을 쌓은 정예군을 직접 지휘하고 중군은 원효 대사가 총수요, 후군은 왕제(王弟)인 김인문(金仁問) 장군이 맡았다.

신라군과 당군(唐軍)은 평양성 밖에서 만나기로 약정하고 당군은 서해에서 남포(南浦)로 상륙하여 평양성의 서문과 남문을 공격 목표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신라군은 대동강을 건너 기 위해 평양성의 동북쪽으로 우회하여 강을 건너 평양성의 북문과 동문을 공격 목표로 삼 기로 하였다.

헌데, 원래 평양성은 이중성(二重城)으로 되어 있었으며 외성이 무너지면 내성으로 후퇴하 여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신라군은 평양성에서 50여 리 떨어진 지점에서 적군의 경비가 소홀한 외곽지역을 빙 돌아 성의 동북방면으로 진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신라군이 평양성의 정남방에 이르렀을 때 당군(唐軍)의 총수 소정방 장군(蘇正方將軍)이 보낸 전령이 급히 내달아 왔다.

소 장군의 전령은 군량미가 부족하니 2만곡(二萬斛)을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큰 싸움에 임하면서 군량미도 준비하지 않았단 말인가?"

김유신 대장군은 대노(大怒)하여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당군측의 속셈은 당나라는 너희 신라를 위해 싸움에 나섰으니 군량미는 너희가 대야 한다 는 계략이었다.

나라의 땅덩이로 보나 농토와 인구로 보나 당나라는 신라의 수십 갑절이나 되건만 조그만 나라에 군량미를 요청하다니 말이나 되느냐는 대장군의 진노였다.

허나, 울며 겨자 먹기로 신라측은 당군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대장군은 50여 리 뒤에서 전군을 따라오고 있는 중군 진영에 전령을 보내 원효 대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군량미를 보내도록 하였다.

원효는 중군에 있는 군량미를 우선 전군으로 보내는 한편 후군에 연락하여 중군에 군량미 를 조속히 조달하도록 하였다.

김유신 대장군이 군량미를 싣고 대동강 하류에서 기다리고 있는 당나라 수군(水軍)에게 인도하기까지는 십여 일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원래의 약속대로라면 이 시각에 신라군은 평양성 외곽에 포진하고 있어야 했는데 갑작스 럽게 군량미를 요청하는 바람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낌새를 고구려군이 알아차렸다면 필시 방어와 공략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점을 김유신 대장군은 가장 염려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서둘러 진군하여 사흘 뒤에 평양성 동북방의 대동강변에 포진하고 하루를 쉰 다 음 야음을 틈타 도강작전(渡江作戰)을 감행하였다.

2만 대군이 강을 건너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곳을 골랐건 만 강폭이 백여 척에다 수심은 가슴에 이르렀다.

신라군이 강을 건너 전열을 미처 가다듬기도 전에 당군 측에서 급한 전령이 날아왔다.

대장군은 봉투를 뜯어 내용에 적힌 것을 관찰했다.

헌데, 소정방 장군이 보낸 내용은 괴이하기까지 하였다.

흰 종이에 난새〔鸞〕라는 새가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그 곁에 소아지 독(犢)자만이 쓰 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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