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임진왜란과 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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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임진왜란과 승군
  • 노승대
  • 승인 2022.06.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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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인 1592년 5월 3일, 단 한 명의 수비군도 없는 한양도성으로 부산에서 20일 만에 올라온 왜군이 남대문, 동대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궁궐의 이미 다 타버렸고 오갈 데 없는 거렁뱅이만 돌아다니는 텅 빈 성이었다. 조선왕인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북쪽 평양으로 달아났다.

황당하기는 왜군도 마찬가지, 장수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 각 군은 조선팔도를 하나씩 맡아 완전히 조선 땅을 평정한 다음 명나라로 들어간다고 합의를 보았다.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전라도 점령을 맡기로 했다. 왜군은 금산을 점령한 뒤 한 부대는 무주, 진안을 거쳐 웅치고개를 넘어 전주로 들어오고 한 부대는 이치고개를 넘어 완주를 지나 전주로 오기로 했다.

조선군으로서도 전라도가 무너지면 군량미와 군수물자가 끊어지고 이순신의 수군도 위험해지는 상황, 두 길목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이치는 권율이 버티고 있었고 웅치는 의병장 황박,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이 지켰다.

웅치전투는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의 연속이었다. 악전고투의 혈투 끝에 정담이 죽고 왜군은 결국 물러갔다. 왜군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잘 싸운 조선군의 시신을 모아 길가에 묻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고 쓴 나무푯말을 세웠다. “조선군의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담력을 조상한다”는 뜻이다. 적이지만 그 용맹함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7월 8일, 이치에서 권율과 황진에게 격파당한 왜군은 금산성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7월 10일 전남 담양에서 올라온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 6,000명이 눈벌에서 왜군을 공격하다 패해 흩어졌고 8월 18일에는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군이 연곤평전투에서 모두 죽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금산 땅에는 700의총, 이치대첩비, 고경명순절비, 영규대사비 등이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모두 훼손을 당하게 된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화합을 깨뜨린다는 죄목을 쓰고 강제적으로 폭파되거나 파손된 것이다.

 

칠백의총 순의비각(殉義碑閣)은 조헌과 영규대사를 따라 일어선 의병들이 싸우다 죽은 내력을 기록한 순의비를 모신 전각이다. 1603년 4월에 세웠다.

 

1940년 금산경찰서장 이시가와 미찌오가 폭파해 산산조각이 난 것을 1971년 4월 서로 이어 붙여 다시 세웠다. 흰 부분은 글자가 없어진 부분이다.

 

칠백의총 앞에 있는 종용사(從容祠) 사당이다. 금산전투에서 죽은 의병과 승병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이름이 밝혀진 선열들을 기록해 놓았다.

 

조헌의 의병은 700명, 영규대사의 승병은 800명이었다. 영규는 “조헌을 혼자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참전해 전멸했다. 700의총 이름이 맞는가.

 

고경명(1533~1592)의 순절을 기리는 비는 1656년 금산군수 여필관이 전사한 건너편 산기슭에 세웠다. 물론 1940년 왜경이 파괴했다.

 

깨어진 비석 조각으로 비석을 세웠으나 지금도 그 옆에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보석사의 영규대사비의 비문도 정으로 쪼아 지웠고 이치대첩비도 폭파했다.

 

1952년 고경명의 후손들이 비문을 다시 새겨 복원했고 1962년 석조비각을 건립했다. 뒤편 기와지붕이 비편으로 비를 세우고 비편을 보관한 건물.

 

비각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 연곤평을 내려다본다. 70세의 고경명은 “지금 이 자리가 충의를 배운 선비가 죽을 자리”라며 아들과 함께 죽었다.

 

조헌의 수심대 사당. 조헌은 임진왜란 이전 옥천 밤티에 살면서 이곳을 자주 왕래하며 후손들에게 “이곳은 화를 피하고 기를 솟게 하는 요지”라 했다.

 

옥천 용암사에도 들렸다. 이 절은 사찰이 들어오기 전 이미 기도처로 쓰이던 곳이다. 그 흔적이 바로 용왕단이다. 건물 뒤편 바위굴에서 샘이 난다.

 

법당 앞에 있어야 할 탑이 조망이 좋은 위치에 나란히 섰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산천비보, 곧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본다.

 

천연으로 튀어나온 바위 그늘 아래, 붉은색이 감도는 암벽에 조용히 서 있는 부처님을 새겼다. 바위 아래 샘도 있다. 기도신단으로 손색이 없다.

 

자연신단에서 출발해 땅을 골라 단(壇)이 되고 글자를 새기거나 비석을 세웠다가 집이 들어서 당(堂)이 되고 전각이 된다. 봉청산왕대신(奉請山王大神) 표석.

 

산신 표석 옆의 산신각. 아마도 마애불 있는 곳이 산신단이었다가 마애불이 들어오며 옆에 산신표석이 세워지고 후일 산신각이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용암사 칠성단이다. 옆에 돌로 쌓은 누석단도 있다. 치성광여래와 칠성여래 표석. 자연신단에서 조금 발전된 칠성단이다. 이제는 기도의 발길이 끊어졌다.

 

옥천 조헌(1544~1592)의 묘로 옥천군 도농리에 있다. 특이하게 비석이 두 개 있다. 사후에 관직이 이조판서, 영의정으로 두 번 추증됐기 때문이다.

 

묘소 아래에 있는 표충사는 조헌과 그의 아들 조완기를 모신 사당이다. 조완기도 금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순절했다. 1734년 영조가 편액을 내려주었다.

 

조헌은 율곡 이이의 제자임을 자처했다. 율곡의 뒤를 잇는다 해서 후율(後栗)이라 자호하며 후율당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후율당도 사당이 되었다.

 

옥천에 왔으니 가산사 영정각을 안 들릴 수 없다. 조헌과 영규대사를 나란히 모시고 있는 건물로 1695년에 지었다. 원래 영정은 총독부에 빼앗겼다.

 

가산사 산신각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영정각과 같은 시기의 건물로 뺄목의 봉황이 세 마리고 청룡, 황룡도 있다. 있을 건 다 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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