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삼재불입지지 해남 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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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삼재불입지지 해남 대흥사
  • 노승대
  • 승인 2022.04.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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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고찰은 단연코 대흥사와 미황사다. 그러나 높이 솟은 두륜산 자락을 연잎처럼 두르고 가운데 씨방 자리에 앉아 있는 절이 바로 대흥사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전까지 변방의 한 작은 절이었지만 서산대사의 유언에 따라 스님의 가사와 발우를 모시게 됨으로써 큰절로 변모하게 된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외진 곳을 선택했는지 묻자 서산대사는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는 땅”, “종통(宗通)이 돌아갈 곳”이라고 말했다.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고도 했다. 삼재가 들지 않는 길지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흥사는 오랜 세월 큰 풍파 없이 제모습을 지켰다. 한국전쟁 때도 큰 피해가 없었다.

가사와 발우를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한다는 의미다. 서산의 법맥은 이렇게 해서 대흥사로 전해졌고 서산대사가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설파했듯이 대흥사는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조선 후기 불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대흥사가 조선 조정의 후원도 받고 선비들의 괴롭힘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표충사(表忠祠)가 있기 때문이다. 사찰에 유교사당인 표충사가 있는 것은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에 칼을 든 승병으로 참전했고 후대에 그 공로를 참작해서 사당을 지을 수 있도록 정조가 허락하고 친히 ‘표충사’ 글씨를 내려준 덕분이다. 국가에서 허락한 사당과 국왕의 글씨가 있으니 사액사당이면서 사액사찰이 됐다. 스님들은 잡역도 면제받았고 오히려 관청으로부터 제향에 쓸 물품을 지원받았다. 자연히 선비들도 와서 행패를 부릴 수 없었다. 국왕을 부정하는 역적이 되기 때문이다.

 

대흥사 초입의 승탑군에는 서산대사의 승탑을 중심으로 역대 13종사와 13강사의 승탑이 밀집돼 있다. 대흥사 스님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대흥사는 다리 건너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다리 남쪽 천불전이 있는 남원구역, 표충사 사당구역, 대광명전 구역 등 크게 네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천불전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만나게 되는 연리근(連理根). 가지가 붙은 연리지나 나무가 붙은 연리목은 많아도 나무뿌리가 붙은 연리근은 드물다.

 

다리를 건너 2층 누각 형태의 침계루 아래를 통과하면 대웅보전과 만나게 된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로 유배 가며 이 다리를 건너갔을 것이다.

 

침계루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다. 녹우당을 쓴 옥동 이서, 백하 윤순(1680~1741)을 이어 우리의 글씨를 완성해 나갔다.

 

대흥사 대웅보전은 광무 3년(1899)에 불이 나서 새로 지었다. 화재방지를 위해 기둥마다 위쪽에 수신인 용을 앉혔고 추녀에도 또 용이 좌정했다.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를 본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조선을 망친 글씨를 걸었다”고 떼어내게 했다고 한다. 추사는 유배가 풀린 후 이를 다시 걸도록 했다.

 

대웅보전 중앙계단 소맷돌 아래의 사자 조각. 짐승이라 하기도 하고 도깨비라 하기도 했지만 범어사의 사자와 같은 양식이라 사자가 맞다. 양쪽 한 쌍이다.

 

위는 제주도로 유배 가며 쓴 무량수각 글씨로 백설당에 걸려 있다. 아래는 유배 후 화암사에 남긴 무량수각 글씨. 기고만장, 안하무안의 속기가 다 빠졌다.

 

천불전 입구의 가허루 현판은 호남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1770~1845)이 썼다. 이광사의 글씨를 따라 배웠으며 호남의 사찰에 유작이 많다.

 

천불전도 순조 11년(1811) 일어난 화재로 없어진 것을 11대 강사인 윤호 스님(1758~1826)이 중창했다. 추녀가 길고 완만해 맵시가 좋다.

 

법당을 다시 중창하며 화재방지를 위해 내부 천장에 물에 사는 연꽃줄기와 그 사이에서 노니는 물고기, 거북, 게 등을 조각해 넣었다. 수중생물 천국이다.

 

천불전의 천불은 경주의 불석으로 맞춰 3척의 배로 실어 오던 중 불상 768구를 실은 배가 풍랑으로 일본 나가사키까지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성당 김돈희(1871~1936)는 대한제국의 관료였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서예가로 살았다. 서화협회장을 지낸 친일인사로 알려졌다. 그가 쓴 용화당 현판.

 

표충사 입구의 호국문은 사당이라 삼문형식을 갖추고 있다. 밀양 표충사에는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서원이 있고 북한 묘향산 보현사에는 수충사가 있다.

 

표충사 편액은 정조가 손수 써서 내려준 것이다. 안에는 중앙에 서산대사를, 좌우에 사명대사와 처영대사를 모시고 있다. 1861년에 다시 옮겨 지었다.

 

표충사기적비는 서산대사 행적을 기록한 비로 전라감사를 지내고 호조판서로 있던 서유린(1753~1795)이 글을 지었다. 그는 이 불사를 후원했다.

 

남원 앞의 무염지(無染池)에도 봄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수련잎도 제 색을 찾아가고 이끼에도 물기가 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연못, 우리의 꿈이다.

 

남도의 산에는 어딜 가도 춘란이 긴 겨울을 이기고 수줍은 듯 가만히 꽃을 내민다. 거드름도 없고 화려함도 없다. 다만 내면의 향을 은은히 피워올린다.

 

강진 백련사 동백숲은 꽃이 질 때 처연하다. 한바탕 바람에 붉은 동백꽃이 미련 없이 솨아~ 쏟아진다. “우리 인생도 저물녘에 저렇게 가야지” 꿈을 꾼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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