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회전(海會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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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회전(海會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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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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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원효성사

태종 무열왕의 대는 맏왕자인 법민(法敏) 이 계승하니 이 분이 제삼십대 문무왕(文武王)이다.

무열왕의 승하를 온 백성이 모두 오열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대각간(大角干) 김유신 대장군의 슬픔이 가장 컸다.

연령으로는 비록 9년의 차이가 있지만 서로 지기지우(知己之友)로서 우정이 남다리리 두터웠고 그 우정을 바탕으로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야망의 꿈을 함께 키워왔으며 마침내 그 반쪽을 이제 이룬 마당에 짝을 잃었으니 그 슬픔이야 오죽했겠는가.

원효는 슬픔을 접어두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새 왕은 왕대로 부왕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대각간 역시 그러하매 백제 유민의 동태며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해야 할 사람은 원효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당시 원효는 공식 직책이 태자사(太子師)였다. 태자의 스승으로 왕궁에 출입하였고 왕실에서도 나라의 스승님, 왕실의 스승님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러하매 태자의 등극에 따른 스승님의 역할이 중차대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지리산 화개동천(花開洞天)에 자리한 화랑연명장의 총지휘를 맡고 있었으니 병권(兵權)의 일부를 관장하고 있는 셈이다.

태종무열왕의 승하를 백성들에게는 병환으로 인한 것이라고 알렸지만 기실은 백제계의 한 자객에 의해 살해된 것이어서 유신 장군과 원효로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백제 유민들이 틀림없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백제인들이 죽기로써 항전한다면 신라로서도 감당하기 어렵다. 어전에는 신왕을 모신 가운데 유신 장군과 원효가 백제 유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신중히 의논을 거듭했고 그 결론으로 유신 장군이 직접 상당한 군사를 휘동하여 사비성으로 출동하고 원효는 다시 화개동천으로 가서 화랑들의 재훈련함과 아울러 백제인들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유신 장군은 곧 1만 군을 이끌고 사비성으로 떠났고 원효는 신왕에게 도성을 지키며, 왕으로서의 할 일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신왕은 백성에게 덕을 베풀어야 하오. 백성들은 전쟁을 치르느라 모두들 지쳐 있으니 덕으로써 위무해 주시오."

원효는 특히 덕(德)을 강조했다. 왕이 권위만 내세우고 덕을 베풀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법. 덕은 햇빛처럼 따스하고 물처럼 부드러우며 우담발화(優曇鉢花)처럼 향기로운 것이다.

왕이 백성에게 덕으로써 위무하면 백성들은 순하디 순한 어린양이 된다. 그러나 덕이 없이 권위만 내세우면 양들은 어느 사이 이리가 되고 독수리가 되는 것이다.

원효는 다시 화개동천으로 돌아와서 상좌 만선(萬善)을 시자(侍者)로 데리고 화엄사(華嚴寺)로 향했다.

화랑소(花郞所)의 대소사는 천관 도인(天冠道人)이 맡아서 잘 해나가고 있으므로 원효는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화엄사로 가는 것이었다. 화엄사는 진흥왕(眞興王)때 신라군이 일시적으로 진주한 적이 있은 외에는 엄연히 백제 땅의 대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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