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광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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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광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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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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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원효성사

도침(道琛) 화상은 걸출한 고승으로 신라에도 이미 알려진 인물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게 되자 계룡산으로 깊숙이 들어가 전세를 관망하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피를 토하며 통곡하고는 조국광복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화상은 수하의 제자들 중에 무술에 뛰어난 제자를 골라 전국 사찰에 파견하여 승군의 봉기를 종용하는 한편 신라군과 당군의 눈을 피해 각 지방을 직접 순행하며 광복군 모집에 착수하였다.

너무도 쉽게 정말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조국에 대한 미련과 향수가 짙게 남은 백성들은 서로 앞다투어 광복군에 가담하여 불과 3, 4개월 만에 도침 화상 휘하에 3만 명의 장정이 운집하였다.

화상은 광복군을 여러 편대로 나누어 산중 절에 분산 수용하는 한편 이들에게 무술과 전술을 가르쳤다.

화상은 백성들의 호응도가 높자 이에 자신을 얻어 왜국으로 밀사를 보내어 왕자 한 분을 모셔오도록 하였는데 풍왕자(豊王子)가 새 임금으로 추대되어 급거 귀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침 화상은 풍왕(豊王)을 모시게 되자 용기 백배하여 광복군 규합에 전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이 급보에 접한 신라는 웅진(熊津)에 머물고 있는 당군 진영에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힘을 합하여 광복군 진압에 나설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고는 만 명의 군사를 젊고 유능한 장군에게 주어 백제 땅으로 진군시키는 한편,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니 전국에서 장정들이 궐기하여 서라벌을 향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나당 연합군과 백제 광복군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광복군은 죽기로 싸우고 도처에서 나당연합군은 그저 싸우는 시늉만 하는 것이어서 그 결과는 광복군의 승리로 귀결지어져 갔다.

일선에서 연전연패한다는 소식이 서라벌에 전해지자 백성들은 지레 놀래어 피난 준비에 바빴고 조정에서는 묘책을 짜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편, 원효는 안양촌에서 사복(蛇腹)과 연일 간자들의 활동상황에 대해서 의논하는 한편 백제 광복군의 동태에 대한 간자들의 보고를 분석하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개선하면서 이미 예상했던 일이매 크게 충격을 받지도 않았지만 '도침 화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아직도 백제에 남아 있는 데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한편 화상을 견제할 묘책을 강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효가 경계하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있으니 무왕(武王)의 조카되는 복신(福信) 장군이 그 사람이다.

복신은 벼슬이 좌평(佐平)이었는데 육부좌평(六部佐平) 중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아니었던 듯하다.

만일 군사를 담당한 최고지휘관인 병관좌평이었다면 지난번 사비성 함락 당시에 이미 전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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