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無所有)를 소유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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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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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그늘 10, 춘성(春城) 스님

춘성(春城) 스님은 유명한 만해(萬海)의 유일한 상좌이다.

춘성 스님과 스승인 만해를 생각하면 나는 늘 두 가지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만해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시인이며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을 초안하였고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엮었고 월간잡지 『불교』를 주간했으며 그의 문장은 지금도 명문(名文)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만해는 동서고금의 학문에 있어서도 남다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같이 글과 지식과 학문에 있어서 가히 독보적인 세계를 지닌 만해가 그의 유일한 상좌인 춘성 스님에게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왜 글 공부를 못하게 했는지 그것이 의문의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만해 자신은 장가를 들어서 딸까지 두었음에도 상좌인 춘성 스님은 장가를 들지 못하게 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게 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승려의 결혼문제에 대한 만해의 주장 또한 유명하다.

만해는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에서 "어떻게 하면 장차 불교를 흥왕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승려들에게 금지하고 있는 결혼을 해제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고 대답하겠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이 싫어서 집을 지을 때, 총독부를 등지고 북향(北向)으로 지을 정도로 항일정신(抗日精神)에 투철한 그가 승려의 결혼에 관한한 일제(日帝)의 통감부(統監府)에 승려가 장가드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탄원을 하고 있어서 모순을 느낀다.

이같이 이율배반을 하면서까지 승려의 결혼을 주장하는 만해가 어찌해서 상좌인 춘성스님에게는 장가를 들지 못하게 했는가, 생각할수록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날, 이 두가지 의문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 때는 나의 은사(恩師)께서 총무원장을 맡아 계시면서 서울로 부르시어 잠시 조계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의 조계사에는 최근 헐어버린 정화회관 터와 이어서 한옥 요사채가 있었고 지금의 총무원 건물 자리에는 단층 일본식 건물이 있었으며 서문(西門)에 문간방이 있을 뿐이어서 대중이 잠잘 곳이 없었다.

때문에 낮에는 총무원과 조계사에서 일을 보던 스님들은 밤이면 선학원이나 대각사 등 가까운 절로 잠자리를 찾아가고는 하였다. 그러나 가까운 절을 찾아가도 잠자리가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본방(本坊)스님들 불편하고 나 또한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아예 조계사 대웅전에서 잠을 자는 것이 훨씬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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