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24> 나무가 마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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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24> 나무가 마르고...
  • 박재현
  • 승인 2018.12.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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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그림. 이은영

어떤 수행자가 운문 선사에게 물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樹凋葉落時如何)?”
운문 선사가 대답했다.
“온몸으로 가을바람을 맞으라(體露金風).”

 

운문雲門 문언(文偃, 864~949) 선사는 중국 선종 5가禪宗五家 가운데 하나인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이다. 절집에 자주 다닌 사람이라면 익숙한 말귀인 ‘날 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나 건시궐乾屎橛 공안이 모두 그와 관련된 이야기다. 건시궐은 잘 알다시 피 어떤 승려가 운문에게 부처가 뭐냐고 묻자 운 문 선사가 ‘마른 똥막대기[乾屎橛]’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건시궐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똥 을 닦는 막대기’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옛날 에는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나뭇잎이나 막대기로 닦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똥이 말라서 막대기 모양으로 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길가에 말라서 막대기처럼 된 개똥마냥 흔하디 흔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처럼 부처도 어디 특별히 따로 있는 것 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어쨌거나 늦가을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앞의 이야기 역시 운문 선사와 관련된 것이다. 『벽암록 碧巌録』 제27칙에 실려 있는데 제목은 「수조엽락樹 凋葉落」이다.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선 문염송禪門拈頌』에도 「수조樹凋」라는 제목으로 수 록되어 있다. 여기서 조凋라는 글자는, 학창시절에 배웠던 세한도에 나오는 공자의 말귀인 “세한연 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고 할 때의 바로 그 글자다. 나무가 말라 들어가는 모습을 나 타낸다. 엽락은 낙엽이라는 요즘 말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니 수조엽락樹凋葉落은 나무가 시들고 잎 이 말라 떨어지는 가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 “나무 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라는 물 음은 그래서 가을에 물어봄직한 질문이다.

운문의 대답은 간명하다. 체로금풍體露金風 즉, 온몸으로 그냥 가을바람을 맞아들이라고 한다. 여기서 로露는 완전히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흔히 이슬이라고 새긴다. 『금강경』의 유명한 사구 게 가운데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아침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으니(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라고 할 때의 그때의 로는 당연히 이슬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이 쓰이는 뜻이 드러낸 다,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노출, 폭로라고 했을 때 의그로가바로이글자다.체로體露라고할때의 로는 온몸으로 그냥 다 감당해내는 형국이다.

금풍金風은 가을바람이다. 추풍秋風이라고도 하고 상풍商風이라고도 한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지는 계절인 가을날의 바람이다. 금金은 성질 로는 결실을, 방위로는 서쪽을, 색으로는 흰색을, 맛으로는 매운 맛을, 감정으로는 슬픔을, 소리로 는 상商을, 오장으로는 폐를, 삶으로서는 노년을 상징한다. 금을 포함해서 오행五行은 물이나 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물, 불 등의 성질을 나 타내는 에너지 작용이나 속성에 가깝다. 나무못은 목木이 아니라 금金이고, 물이 쇠처럼 날카롭게 사 용되면 그 역시 수水가 아니라 금金이다.

『선문염송』에 보면,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때[樹凋葉落]...”라 함은 피부는 다 떨어져 나가고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남아있다고 한 경지라고 설명되어 있다. 나와 세상을 변명하고 장식해온 온갖 것들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게 뭐냐는 살벌한 물음이다. 그래서 『선문염송』에서는 다시 묻는다.

“무쇠나무에 꽃 핀 일 헛되지 않으니 가을바람 불어오자 인간 세상에 두루 떨어졌네. 이 꽃 한 송이 를 누가 주울꼬[鐵樹花開不等閑, 金風吹落遍人閒. 不知一 片是誰得]?” 꽃이 낙엽이고 낙엽 속에 내가 있으니, 낙엽도 없고 주울 사람도 없으니 그저 소슬한 가을 바람만 계곡을 채울 따름이다.

가을이 너무 깊었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펴면 가을이 손바닥 가득 모여 든다. 아기가 잼잼잼 하 듯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 햇살은 손바닥 안에서 눌리거나 부풀어 오르며 가을이 만져진다. 가을은 손안에서 따끈한 표정으로 머물러 있다가 손바닥을 쫙 펴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간 다. 뜨끈한 입자들이 뜨끈하게 손가락 사이를 물 결치며 흘러나간다. 적멸처럼 마른 잎사귀가 쏟아 지는 가을 숲속에서, 무너졌거나 무너져 가는 것 들이 너무 안쓰러워 나는 속으로 울었다. 말라비 틀어진 잎사귀가 바람에 쓸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릴 때 나는 아이처럼 낙엽을 잡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문득 나도 어느새 낙엽 같은 중년 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귀밑을 스치는 소슬바 람이 섬뜩했다.

이제는다만기도하며살고싶다.이미쓰러 져간 것들과, 쓰러져가는 것들과, 쓰러져갈 것들 을 위해 기도하며 살고 싶다. 그러다가 그것들과 내가 기도 속에서 하나 되어, 마침내 기도하는 것 도 기도할 것도 구분이 없어져 그냥 모두 가을 속 에서 가을이 되었다가 마침내 겨울을 맞아들일 것 이다. 그래서 내 의지나 욕망 따위도 함박눈에 쌓 인 자동차 미등처럼 희미해질 때, 나는 눈 속을 헤 집고 지난가을의 낙엽을 밟으며 겨울 산을 더듬어 오르고 싶다.

가을산의붉고마른풍경이차창밖에서부 풀어 오를 때, 나는 속으로 흑흑 거리며 겨우 가을을 견뎌냈다. 이 풍경 속 어디선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났고 또 헤어졌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살갑게 굴다가도 구시렁거리거나 짜증냈고, 다시 는 찾지 않을 것처럼 휑하니 나섰다가도, 얼마 가 지 않아 너무 미안해서 차마 더 가지 못하고 길가 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 대 쭉 빨아들였다. 세월의 한 귀퉁이에 숨어 힐긋힐긋 지나가는 것들을 훔쳐 보다가 어느새 나도 그 풍경 속의 하나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세월이 낯설고 두려워 나는 몸이 떨 렸다.

어미의 가을은 늘 풍성했다. 굽은 허리로 밭둑 을 헤집고 굳은살 배긴 손끝으로 고랑을 갈아 심은 씨앗이 뭐가 될까 싶었지만, 가을이 되면 가지마 다 불그스름한 열매가 익었고 땅속을 헤집으면 굵 게 여문 것들이 마술처럼 덜렁거리며 딸려 나왔다. 어미의 가을은 흘러넘치는 모유母乳처럼 내 유년 을 젖 먹였고, 그 비릿한 세월 속에서 나는 내 목숨 을 부지했다.

어미는 아무거나 잘 먹지 못하고 작 은 일에도 힘들어하는 나를 볼 때마다, 어릴 때 젖 배를 곯아서 그렇다며 늘 안쓰러워했다. 젖이 모 자라 쌀뜨물을 떠먹였다고 말할 때마다 무슨 죄지 은 사람처럼 나를 바로 보지 못했었다. 가을을 거 둬들이며 어미는 늘 말했다. “감자 반쪽을 심으면 열 알이 달리는데, 농사꾼이 부자 못 되는 게 이상 하지 않으냐?” 그렇게 말할 때, 어미의 늙은 등짝이 더 굽어 보여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가 돈 주고 배운 것들이 흙에서 배운 어미의 정 직한 말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때는 글이 우러나오는 줄 알았다.그냥뭔가 쌓이고 쌓이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출수처럼 저절로 삐져나오는 것인 줄 알았다. 글이 쥐어짜내는 것인 줄을 알기까지 별로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새 내 서랍 속에 쓰다 남은 일회용 반창고와 붕대가 세월없이 나뒹굴고 있다. 유효기간을 한참 넘긴 빨간약이 있고, 모형 탱크 같은 검은 혈압계가 뉘어져 있고, 그 사이로 채혈 침 몇 개가 굴러다닌다. 그렇게 내 서랍이 내 아비의 서랍을 닮아가고 있다.

참 멀리 왔고, 참 오래 왔다. 그 세월 속에서 별로 건진 게 없어 스스로 안쓰럽지만, 그래도 장하다고 스스로 쓰다듬어 주고 싶다. 늦은 가을 산에 단 풍이 곱다. 죽은 어미가 보고 싶어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마른하늘엔 어미가 없었다. 부풀어 오른 하늘 속으로 가을만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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