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 만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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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 만났기에
  • 관리자
  • 승인 2007.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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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나의 다짐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송구스럽지만 이것은 제자신에 대한 약속이요 다짐으로 생각하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저는 1남6녀중 5녀로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친가의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다가 탕진하고 가세가 어려울 때 중매결혼하여 2남2녀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부처님법 만나 활기찬 내 참된 인생을 찾을수 있었던 것도 결혼하면서부터 너무도 괴롭고 서러웠던 생활이 있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얼마 후 이웃에 계시는 보살님 덕분으로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시집온 새댁이 밤낮 울면서 살으니 보기가 딱하셨든지 ‘절에 갑시다 절에 가서 바람도 쐬우고 기도도 하면 어려운 일도 풀린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찾은 절이 경기도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였습니다. 저는 부처님 설법이 어떤 내용인지 팔만대장경이란 말은 들었어도 그것은 나와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것 쯤으로 알았기에 설법이 없어도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우선 살 것 같았으며 복잡한 집안에서 나와 시골길따라 솔바람소리 들으며 걷는 것이 좋았습니다. 봄이면 뻐꾹새 소리 들으며 아지랑이 사이로 아스라이 비치는 내 어릴쩍 꿈이 거기에 있기에 마냥 좋았습니다. 흰눈이 소복히 쌓여 산오르기가 힘들어도 멀리 고요히 흐르는 침묵이 있어 더욱 좋아하며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하지만 절에 가는 날은 그래도 위안이 되었지만 평소에 제생활은 속된 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사건들의 연속이었고, 남편이란 사람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더군요.거기다가 아이들은 너무도 속을 상하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생활이었습니다. 신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울분으로 세월을 보내야 하니 저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면 어려운 문제들이 풀린다기에 정안수 떠놓고 향 사르고 하루도 빠짐없이 천수경을 읽었습니다만 어려움은 날로 더 하고 자리 보존하고 누워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다가 식구는 많고 일이 많으니 그나마 마음 편하게 누워 있지도 못하고 먹은 것은 소화가 되지 않으며 약도 듣지 않더군요. 병원 의사선생님 말씀이 정신과 병동에 입원을 해야 한다는 소리에 제자신 너무도 비참해지더군요. 하지만 이래서는 안된다고 몸부림쳤습니다.

 친정도 멀리 있고 누구 하나 뒷바라지 해줄 사람도 없는 처지이니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더군요. 뜨겁게 키워온 내 인생의 포말은 결혼과 더불어 비참하게 무너져 버렸고 제가 의지할 데라고는 부처님 밖에 없다하여 회암사 절로 갔었지요.

 “스님! 절에는 왜 다닙니까?”

 “도대체 이런 생활의 연속이라면 무슨 소용이 닿겠습니까?” 무엇을 내가 얼마나 잘못하였기에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요?“

 그 때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가 구하는 마음에서 절을 찾는다”고 하시더군요. “구하는 마음이 제각기 다른데 그것이 다 이루어 질 수가 있습니까?” 고 여쭈었더니 스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책을 한 권 주시더군요. 불교성전이었습니다. 열심히 읽었습니다.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언어 또한 생소해 이해하는 정도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어 답답하기만 하더군요. 그렇게 제 생각이 한정된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저의 생활은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건강은 더욱 나빠졌으며 정말 살고 싶지 않더군요.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결혼 2년 만에 큰 딸이 태어났고 어려운 살림에도 시동생을 결혼시키고, 근검절약하여 저축하면서 융자받아 집도 하나 장만하였지요. 한방에서 몇 식구가 살아야 하던 때 보다 훨씬 부자같았는데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저희집 거사님께서 자산이 없는 출판회사에 취직되어 일해 오다가 저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갑자기 사표를 내고 다른 회사로 옮겼는데 그 회사가 무너지는 통에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집에서 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팔았으며 먹고 사는 것은 겨우 연명만 할 정도였습니다. 식구가 많으니 좋은 음식은 구경도 못하였지요. 은행융자 빚이 늘어나니 집을 팔아 청산하고 구멍가게를 해보았지만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도저히 가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 다른 분에게 넘겨 주고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했습니다. 몇푼 남은 돈을 마을금고에 넣고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걱정인데 그 와중에 저희집 거사께서 저 몰래 대학원 시험을 쳐서 합격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하도 기가차서 말이 안나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이 들지만 소원한번 풀어주자. 한 사람이라도 좀 사랍답게 살아야지 싶어 등록을 했습니다. 남자가 할 일이 없이 집에 누워있는 것 보다는 공부라도 하는 것이 한결 좋았습니다만 그것도 잠시지요. 생활에 위협을 받으니 저라도 무엇을 해야겠다 싶어 월부 장사를 해서 남편의 공부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죽지 않고 병원신세 지지 않고 살아온 것이 이웃 덕분이며 부처님 은혜인 것 같습니다. 83년 3년6개월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할 때 형언할 수 없는 감회와 부처님의 크신 위덕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전셋집에서 전세방으로 전세방에서 더 작은 방으로, 빚은 빚대로, 머리가 무겁고 육신도 고달프고 하니 참 많이도 서러운 생각들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즈음 회암사가 너무 멀어 봉은사로 다녔습니다. 그 때까지도 여전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가 사는 방이동에서 봉은사까지 많이 걸어 다녔으며 불전함에 천원 한번 못 넣어보고 그냥 “부처님! 부처님!” 하며 부모님 찾는 심정으로 마냥 울면서 절 하다가는 집으로 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봉은사에서 선덕행 보살님을 만났지요. 이웃이기도 하였고 아이들 일로 더욱 가깝게 되면서 그 보살님 아파트에 수요일날 법회가 있는데, 그 내용이 좋으며 설법을 참 잘하는 보살이 있으니 가보자고 하여 따라갔습니다. 처음 갈 때는 그저 그렇겠지 하고 귀동냥만 하자하고 호기심으로 갔었지요.

 깨끗하게 생기신 분이 단정하게 앉아서 여지껏 들어보지도 못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안으로 꼭꼭 다져 묶어둔 내 거룩한 자존심과 십여년 법문을 들었다는 그 잘난 아만심 보따리를 구품화 보살님께서는 힘도 안들이시고 하나 하나 풀어 꺼내어 열거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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