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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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목에 대하여
  • 관리자
  • 승인 2009.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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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강의 3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묘(妙) · 법(法) · 연화(蓮華) · 경(經), 이렇게 네 개의 낱말로 되어있는데 묘법이란 삿ㅡ다르라하여 정법(正法)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正)법화경이라는 제목이 있게한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정(正)자를 묘(妙)자로도 번역하는데 묘법(妙法)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묘법이란 온갖 형용을 초월한 가장 깊고 의미있는 뜻으로 최고 · 절대의 진리이며 이것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수용하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동시에 모든 것에 눈을 떠서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게 한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두두물물, 탱화나 등상불, 저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 전부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게 한다는 것이 묘법입니다. 그래서 이 묘법을 일반적으로 표현하여 우주의 총합적이고도 통일적인 진리라고 합니다.

 이 우주는 어떻습니까? 앞서 초점을 여기에다 맞추자고 했는데 이 우주와 세계속에는 여러 가지 사물이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사물에는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근거로서의 법(法)이 있습니다. 돌은 돌대로 풀은 풀대로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전부 각자 지탱하고 있는 근거로서의 법 이것을 흔히 일체법 또는 제법이라 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부분적인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잔은 잔대로 볼펜은 볼펜대로 전부 그 나름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의 부분적인 진리인 이 제법은 각각 독립되어 있긴 하나 또한 고정된 것은 결코 아니고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즉 서로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내면성에 있어서 이들의 본질은 온전하게 하나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일적인 진리 또는 통합적인 진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입각해서 제법은 독립된 입장인 동시에 그 가운데는 통일적인 진리로서의 입장이 있는 것이므로 거기에 비로소 회삼귀일(會三歸一)이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편찬하는 이들의 각양각색의 목적과 심성과 욕망을 전부 하나로, 불성이라는 것으로 귀착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단체나 모임이 하나로 뭉칠 때는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찾지 않고는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하나됩시다. 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회삼귀일의 확실한 근거는 바로 이 일체법[諸法]은 전부 개별적인 진리로서도 존재하지만 본질상에 있어서는 통일적인 진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법화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인 동시에 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연화(蓮華)는 우리 불교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아름다운 꽃이지요. 경(經)의 원제목이 삿 ㅡ 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ㅡpundarika sútra)로 되어 있는데 푼다리카는 흰 연꽃을 말합니다.

 연꽃에는 백련(푼다리카) 홍련(파드메) 청련(카마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묘법 뒤에 연꽃이란 말이 붙어 있느냐하면 묘법이란 보살에 의해서 현실적으로 우리의 생활속에 구현되어야만 진리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법의 묘함을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이기 위하여 연꽃에 비유한 것입니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지만 항상 청정함을 잃지 않고 있음이 특징입니다.

 또 하나는 진흙 속에서도 아주 깨끗하고 좋은 꽃을 피운다는 것으로 법화경이 성립된 과정과 관계됩니다. 그당시 불교인으로서 불교인답지 않은 사상과 행동을 하고 있는 소승의 무리들 속에서도 진정한 부처님의 사상을 구현하는 참다운 불자가 나타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연꽃이 진흙 속에서 깨끗하게 피우는 것으로 멋있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의 종단현실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순수하게 부처님 경전을 마주하고서 강의하고 독송하며 서로 모여서 배우고 일깨우는 이런 시간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연(蓮)이란 꽃이 필 때에 이미 연밥[蓮實]이 그 속에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원인속에 결과가 있고 결과속에 그대로 원인이 있다, 적문(迹門)속에 본문(本門)이 있고, 즉 부처님의 역사적인 사실속에 영원한 불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또 영원한 부처는 바로 역사적인 사실로서 드러남으로 해서 영원한 불성이 비로소 그 불성으로서의 가치를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불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방치해 버리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훌륭한 수행자답게 살아갈 때 우리속에 있는 불성이 비로소 현현하는 이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옥에 가든 어디에 가든 아무 상관없이 부처님의 생명이 무량하듯이 우리들의 영원한 불성도 항상 내재되어 있는 것이어서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있다하여도  결국 우리속에는 똑같은 구원불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바로 연꽃과 연밥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원인이면서 결과임을 비유하는데 아주 적절한 꽃이다 하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으로서 구마라습의 제자 도생(道生 : ?~434 ; 北宋의 竺道生)의 「법화경소(法華經疏)」에도 실려 있고 광택사 법운(法雲 : 深의 法雲 ; 467~529)스님의 「법화경의기(義記)」에서도 그렇게 해석한 바가 있습니다.

 연꽃은 이렇게 미묘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 하게 된 것입니다.

 경은 모두 익히 아는 바이므로 중언부언하지 않겠습니다만 굳이 설명한다면 성인의 말씀을 경이라고 알면 좋겠습니다.

 경문(經文)에 들어가기 전에 영험담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영험이 수승하다고 하지만 특히 법화경의 영험은 추종을 불허하는 지대한 영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영험담을 단순한 설화로 또는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로만 생각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법화경을 서사하면 좋다고 하니까 부모를 천도하기 위하여 묘법연화경의 묘(妙)자를 막 쓰자마자 부모가 벌써 지옥에서 천상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건 또 별 거 아니고 또 어떤 사람은 법화경을 쓰려고 시장에 가서 종이를 사는데 그 순간에 부모가 천도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절대 웃을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한마음을 냈을 때 그 가운데는 이미 성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본래 성취되어 있는 원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원리없는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 수 있을까? 묘(妙)자를 쓰고, 시장에 가서 종이를 샀는데 왜 그렇게 성취되었을까? 본질적으로 우리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하는데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이를 법화행자(法華行者)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특히 우리 스님[수행자]들은 신앙심이 우선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여부는 정확하게 알든 모르든 간에 굳이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법화경을 펼치게 되면 대단히 의아스러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부처님 한 분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익히 아는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천상의 온갖 보살들이며 신장들 · 마후라 · 아수라 등 수억만 명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의 서툰 생각으로 도대체 과연 현실적으로 있는 일인가, 없는 일인가 할 때도 있고 또한 그러한 것을 문학적인 미화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우리 신앙인들로서는 절대 금물입니다.

 우리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에 참으로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이것이 진짜 있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과연 없는 것입니까? 이렇게 질문할 때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다 불교에 상당한 이해가 있으시니까, 상당한 이해가 있는 사람일수록 대답을 못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컵이, 이 마이크가, 이 건물이 과연 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대답을 못할 것입니다. 그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부정할 것입니까? 그것도 대답을 못할 것입니다. 그 대답을 못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사실 대답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몰라서, 지식이 부족해서 대답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화경에 나타나는 온갖 보살 · 신장 · 천룡팔부에 대한 실질적인 존재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행위는 우리들 신앙인으로서는 금물입니다. 경전에 있는 여래의 진실한 뜻[願解如來眞實意]이 우리에게 참답게 다가설 때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지극히 조심스럽게 경전을 대해야 되겠습니다.

 함부로 단견을 가지고,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을 내려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것으로 최소한 수행하는 스님들만이라도 그런 조심스런 태도가 제일 바람직한 것입니다.

 이게 정말 있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좁은 소견이며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과연 있는 것인가? 실지로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우린 아침 저녁으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하면서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런 자세는 경을 공부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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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명심회(明心會)가 주관, 200여 분의 스님들을 모신 가운데 1991년 가을 수덕사에서 개설된 '법화경 강의' 내용을 녹음, 편집부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명심회는 주로 범어사 강원을 졸업, 무비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스님들(10여분)의 모임입니다.                     ㅡ문책기자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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