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難治病)-뉘우침(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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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難治病)-뉘우침(悔)-
  • 관리자
  • 승인 2009.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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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악산 한화(雲岳山 閒話)

부끄러움을 알아야지

저유명한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날의 똑똑치 못했음을 깨닫고

오는 날에 뒤따를 방법도 알았다.

잘못에 든 지가 실로 오래치 않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노라.

悟己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途其末遠 覺今時而昨非

대체로 이러한 내용이었으니 그 사연을 잠시 살펴보건대, 그는 너무나 가난해서 끼니가 온데 간데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빈한하건만 선비의 기풍을 어기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는데, 그 이웃에 아주 불량한 청년이 있어 자주 그를 꾸짖게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숙부가 너무 굶는 게 딱해서 관가(官家)에 줄을 대어 팽택(彭澤)이라는 조그마한 고을 군수자리를 하나 얻어 갑니다. 이때 같은 동리에서 그의 꾸지람을 자주 듣던 불량 청년은 도연명을 골탕 먹일 심산으로 상급 관청에다 돈을 써서 독우(督郵)벼슬을 따냅니다.

독우란 요즘의 감사원(監査員)같은 것인데, 그가 독우를 애써 따낸 뜻이 따로 있는지라 당장에 팽택령(彭澤令)을 다루겠다고 나섭니다.

도연명은 이 통지를 받아 놓고「내 어찌 닷말의 좁쌀 때문에 평소의 지조를 굽히랴」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표서와 관복을 벗어 놓고 돌아오면서 읊은 글이 「귀거래사」입니다.

오늘 말씀하려는 주제는「뉘우침」입니다만, 뉘우침 그 자체는 선도악도 아니어서 때로는 잘못을 뉘우쳐 선으로 돌아가게도 하지만 때로는 잘 한일을 뉘우쳐 도리어 잘못을 범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속담에「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먹는다」고 했는데 기껏 얻은 일자리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더구나 시까지 읊으면서 떠난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겠지만 옳지 못한 자를 감독관이라고 모시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 뉘우침에는 반드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부끄러울 참(慚)자와 부끄러울 괴(愧)자가 자주 나오는데, 전자는 자기 양심에 비추어보아 부끄럽다는 것이요, 후자는 남 보기가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뜻입니다.

또 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반드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등 3독이 없어야 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 등 3독이 없을 때에 부끄러움 등이 착한 법이 이루어지고, 부끄러움 등이 없을〈無慚無愧〉때에 탐욕 등 좋지 못한 법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탐욕이 없으면 자기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이 여길 줄 알게 되고, 이어서 뉘우치게 되어 착한 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한 추세입니다.

자신의 잘못부터 뉘우치자

그러나 일을 당하여 냉철한 판단력으로 잘잘못을 가려낸다는 것은 적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당장에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깊이 들어가기 전에만 발견되어도 퍽이나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도연명도 잘못된 길이 그다지 깊지 않았으니 미래를 좀더 착실히 가꾸면 보충이 가능할 것이라 했고, 그의 그러한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어 온 것으로 압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합리화하고 남의 흉을 보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옛 어른 들은 그 인품을 헤아릴 때 남의 말 하지 않는 정도의 여하에 따라 덕이 높은가 낮은가를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발견했거든 곧 고치기를 힘쓰고 남의 허물을 보았거든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 일깨워주고 남의 충고를 받았거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결국은 허물이 없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허물을 어떻게 뉘우치고 어떻게 소화시키느냐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나 합니다.

임진왜란 때 당파싸움만 아니었다면 그토록 무참히 패배하지 않았을 텐데, 한일합방 때 우리가 조금만 눈을 떴더라면 일본에게 먹히지는 않았을텐데, 월남패망 때 종교분쟁만 아니었더라도 그토록 참변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등등의 아쉬움이 없지 않은 것은 민족적 뉘우침입니다. 8.15해방 후 우리 교단이 최소한 이러이러 했으면 이렇게 해마다 절에 나오는 신도가 줄지는 않았을 텐데... 등등은 교단 적 차원에서 느끼는 뉘우침입니다.

요즘 자주 만나는 일로서 젊은 청년들이 직장 때문에 상담을 청해 옵니다. 애를 써서 억지로 직장을 하나 구했는데 한참 있다 보니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더라는 것이에요. 자기들은 기독교 신자이어서 기독교적으로 사상을 통일하겠으니, 계속 있으려면 전향을 하고 전향을 않겠다면 나가라는 것이랍니다. 쉽사리 선택하기 어려운 두 갈래 길입니다. 평생을 몸 바쳐 신봉키로 삼보전에 다짐했던 불교를 버리기도 어려운 일이요, 노부모를 모신 청년으로서 겨우 얻은 직장을 버리고 또 끝 모를 구직 방황을 해야 한다는 것도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선뜻 우리 교단, 또는 우리 불자업체에 이러이러한 일터가 있는데 급여는 적더라도 우리끼리 뜻 모아 잘 해보세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속절없는 벙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주리면 개울물 떠 마시고

곤하면 팔을 베고 눕는다.

더구나 중천에 달 돋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만족하지 않은가.

듣기에는 그럴듯한 일이나 빵이 필요한 자에겐 빵 이외의 무엇이건 한낱 관념론적인 유희에 불과합니다. 심각한 입장에 놓인 사람에게 굶어 죽어도 영광이라 한다 해서 지당 하십니다 할 백성이 없습니다.

진정한 애국 애종을 위하여

지난날 불교정화 싸움이 한 창이었던 67년경의 어느 날 저녁 김법린, 최범술, 최갑환 등 이른바 대처승 측 거두 여러분이 조계사를 찾아와서, 앞으로의 교단은 젊은이들의 직장을 많이 만드는 방향으로 이끌 것을 약속해준다면 자신들은 모두 손들고 물러나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정화주동세력의 젊은 스님들이 열을 냈지요. 이 못난 사람들아, 우리가 불교정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 어디 젊은이들 직장 만들어주자고 이 지랄인 줄 아느냐면서 주먹질까지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말단에 있던 나로서는 저분들의 주장이 일리가 없지 않다고 생각되었으나, 어쩔 수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때 그토록 불교의 사회화를 반대했던 부산물로서 나타난 결과를 본다면 너무나 깊숙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치게 합니다. 그렇건만 아직도 나라는 나라대로 교단은 교단대로 공론이 분분하니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진정한 애국 애종이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뜻있는 이의 집약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고, 그 실현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지난 달 26일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고 야단들입니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필리핀의 사건을 교훈 삼으라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스페인과 미국의 통치를 연거푸 받는 동안에 카톨릭 신자가 국민 전체의 85 %에 달하고 있는 그 나라에서 쫓겨난 이도 천주교인이요, 쫓아낸 이도 천주교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85%의 세력이 어제까지 떠받들었는데 일조에 실각하는 요인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우리도 그들처럼 뭉쳐서 떠받드는 법도 익혀야 되고, 서로 돕는 법도 안 맞으면 싹 돌아 설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면 배워야 할 것입니다. 뒷날의 뉘우침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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