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철학(9) -中道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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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철학(9) -中道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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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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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강좌

 

➃ 니르바나(Nirvana)를 얻기 위한 방법들에 있어서 차이점; 히나야나들은 푿가라-나이라트미아(Pudgalanairatmya)의 실현, 곧 자아(自我)의 실재를 비우므로써, 자각하고, 자아의 실재를 없애므로써 그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마하야나들은 푿가라-나이라트미아의 실현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르마-나이라트미아(Dharma-nairātmya),곧 존재의 모든 요소들이 비실재(非實在)한다는 사실, 어떠한 것이든 그들의 고유한 독립된 실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므로써, 비로소 그는 나르바나를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하야나(Mahayana)에 의하면, 푿가라-나이라트미아와 다르마-나이라트미아는 니르바나를 성취하는데 필연적인 것이다.

➄아바라나스(Āvaranas), 장애물을 없애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점: 장애물을 제거하는 문제는 위에 언급한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히나아나들은 실체가 정욕(情慾)의 장막(āvaranā)에 의해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니르바나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들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장막(장애물)들이란 속박, 구속, 증오, 망상과 기만(kleśavrana)등인 것이다. 망상(kleśavarana)은 니르바나를 실현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장애물같이 행동한다. 그러므로 크레스아바라나는 니르바나를 얻거나 도달할 수 있기 전에 제거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애물은 동일한 인격체를 지닌 자아, 개인들의 믿음 <샅카야드르스티(Satkayadrsti)>에 근거한 그들의 행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제거하는 방법은 오직 푿가라-나이라트미아, 개인적인 자아의 비실재성을 자각하므로써만 가능한 것이고, 이 장애물들이 제거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장애물과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것은 자아의 비실재성을 자각하는 것과 연결되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히나야나들은 이 장애물들의 장막을 걷우어 버리며 없애버리는 것이 니르바나를 얻는데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하야나들은 참다운 실체와 참다운 진리는 장애물들 뿐만이 아니라 기네야-아바라나(Jñ eyāvarana), 진리를 가리는 장막에 의해서도 가리워져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참된 진리를 가리우고 있는 기네야아바라나를 제거하는 것 역시 필연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기심을 없애는 것<다르마나이라트미야>과 존재의 모든 요소들이 텅 비워 있다는 것<다르마순야타>을 깨닫고 자각하므로써 가능한 것이다.

크레사아바라나(Kléŝavarana)를 제거하는 것이 푿가라나이라트미아의 자각과 관련이 있듯이, 기네야아바라나를 제거하는 것은 다르마나이라트미야의 자각과 똑같게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마하야나들은 니르바나<완전한 참된 예지, 진리, 지혜로 충만된 자유, 해탈>를 얻고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크레스아바라나의 제거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기네야아바라나의 제거없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⑥다르마의 개념에 있어서 차이점; 하나야나들은 확실한 궁극적인 실재들을 다르마(Dharama)라고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다르마란 말을 번역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것은 때때로 사물로 번역되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그 말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로는 「다르마스(Dharmas)」란 말이 사물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만 하겠다. 「존재들의 요소들」,「궁극적인 실체들」이란 말들이 다르마스이 보다 나은 번역들이다. 히나야나들은 이 세계가 단순하고, 순간적이고, 그리고 비인격적이고, 확실하고 궁극적인 다르마스들의 끊이지 않는 흐름으로 구성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삼스크르타(Samskrta:기호가 있는 다르마들)이고, 그들의 약간은 아삼스크르타 (기호가 없는 다르마들)들인 것이다.

마하야나들에 의하면, 이들 다르마스는 전연 궁극적인 실체들이 아니며, 오직 정신적인 구성물인 것이다. 마하야나들은 소위 궁극적인 삼스크르타 다르마스와 아삼스크르타다르마스일지라도 조건과 제한성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상대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순야(Sūnya,空)-실체의 비어있는 상태-인 것이다.

➆불교학의 개념에 관한 차이점; 붇다의 육체를 지닌 모습, 인간의 모습은 단지 보이는 육신일 뿐이다. 하나야나와 마하야나들은 이것을 실재하는 참된 붇다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초기 불교는 붇다가 그의 요기로서 지닌 능력을 발휘하여 그가 나타나 보이기를 원한다면 어느 곳에서나 언제고 나타나 보일 수 있다는 가상의 육체인 니르마나카야의 관념과 생각이 발전을 하였다. 히나야나와 마디야미카 둘 사이에는 이 육체에 관한 견해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붇다의 다르마·카야의 개념에 놓여 있다. 히나야나에 의해서 도달한 다르마카야에 관한 최고의 개념형성은 그것이 붇다 성품을 전부 다 합친 것이었다. 그의 후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피난처와 위안을 찾을 때, 그가 그러한 것을 찾는 것은 붇다 안에서 찾은 것이며, 바로 이 붇다의 본성 안에서 얻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 사라져 버린 가우타마 붇다안에서 그 피난처와 위안을 찾은 것이 아니다.

마디아미카는 다른 방법으로 다르마·카야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삼보가·카야(Sambhoga-kāya)의 개념의 발전은 요가챠린스(Yogacarins)의 공헌이었다. 우리들은 독립된 제목 아래서 이들 카야들의 개념을 공부하겠다.

⑧히나야나는 지적(知的)이며, 마하야나는 신심을 중심으로 신앙적이다; 히나야나는 전적으로 지적이다. 히나야나의 주요한 관심은 붇다에 의해서 가르침이 베풀어졌던 팔정도(八正道)를 따르고 준수하는 것이다. 히나야나에 있어서, 이것은 붇다가 강조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마하야나에 있어서 붇다는 신으로 모셔졌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최고의 실체, 즉 신 그 자체였다. 불교에 있어서 신의 개념은 창조자의 개념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을 지니고 애정과 동정어린 정열로 충만된 신적인 사랑의 개념인 것이다.

그는 열렬한 신앙심으로 믿음의 대상이다. 마하야나들의 그에 대한 열렬하고 굳건한 신앙심은 조각과 회화 등의 예술로서 승화되고 발전되었다. 붇다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조각되어 만들어 졌고, 그를 표상하는 뛰어난 상상적인 그림들과 그의 삶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졌다.

마하야나들은 프라기아나<초월적 지혜, 초월적 예지>로의 험난한 길은 오직 보다 잘 준비되고 보다 높은 지적수준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 가능성이 보다 크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평균의 보통 능력을 지닌 사람은 오직 붇다에게 굳건한 신앙심을 지니고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그는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붇다는 아바로키테이스바라(Avalokitesvara), 관세음불, 아미타바(Amitabha), 아미타불, 또한 우리에게 오고 있는 미래의 붇다인 마이트레야<미륵불>의 모습으로 경배되어지고 예배되어지며, 우리 인류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⑨히나야나는 다원론적이며, 마하야나는 일원론적이다; 히나야나 철학은 극단적인 다원론의 한 철학이며, 이에 반하여 마하야나의 철학은 분명한 이원론적이 아닌 일원론적인 철학이다.

⑩히나야나는 이성론적, 합리론적임에 반하여, 마하야나는 신비적이다; 히나야나에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진리에의 도달하는 길은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 합리론, 이성론임에 반하여, 마하야나에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진리에의 접근하는 탐구 방법은 초이성론, 초합리론의 하나이며 신비주의이다.

 

마디야마카, 중도철학의 주요한 특징들

1.순야타-순야타-空

마디아마카-중도(中道), 가운데 길-의 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순야(Sūnya,空)의 순야타(Sūnyatā)의 그 영원한 순환 용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곧 이 체계에 대한 이 생각이 중심이기 때문에 이 체계를 지닌 마디아마카 철학이 순야바다(Sūnyavāda)-Sunya- 는 공(空), vāda 는 이론이란 뜻으로써 인도 유럽 언어의 원형-라고 알려져 있으며, 이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실체에 대한 특성으로서 순야를 주장하는 것이다.

순야는 불교철학에서 가장 혼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말이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것을 오직 허무주의로만 지금까지 해석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어원적(語源的)으로 순야란 말은 「증가한다, 확장한다」라는 의미를 지닌「스비(Svi)」란 것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이상하게도 브라흐만(Brahman)이란 단어도 「증가한다. 확장한다」하는 의미를 지닌 「브리흐(brh)」또는 「브림흐(brmh)」란 어근을 지닌 단어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붇다는 순야타트바-순야(空)의 실체, 순야의 원리-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이야기되어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와 같은 관련속에서는 이 순야란 단어는 존재론적 의미로 사용되어져 온 것처럼 보인다.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어원적인 의미의 함축되어 있는 뜻이 현재까지 완전하게 풀리고 밝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일련의 학자들에 의하면 순야란 말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오직 영혼구제론적인 제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순야란 말은 가치론적인 높은 소리와 영혼구제론적인 배경과 함께 분명히 존재론적 의미로도 사용되어져 왔다.

존재론적 의미에 있어서는 순야는 텅비어 있으되 꽉 차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면에서는 무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사물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체<타트바·Tattva>, 최고의 실체<파라마르타·샅Paramārtha-sat>와 절대적인 것<니르바나>와 동일시 되어져 왔다. 그러면 무엇이 순야-타트바<순야의 실체>란 말인가? 여기에 관해 나가주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라프라티아얌 산탐 프라판챠이르 아프라판치담/

니르비칼팜 아나나르탐 에탙탙트바시야 락사남//

Aparapratyayam Sāntam prapañcair aprapañcitam/

Nirvikalpam anānārtham etattattvasya laksanam//(M.K.XVⅢ,9)

①그것은 아팔프라티아얌, 즉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경험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스스로에 의해서 자각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②그것은 산탐(Santam)이다. 그것은 침묵속에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외부의 감각적인 마음에 의해서 영향받지 않는 것이다.

③그것은 프라판차이르 아프라판치탐이다. 곧 언어로서, 언어의 세계를 가지고는 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④그것은 니르비칼팜이다. 곧 그것은 산만한 사유들에 대하여 초월적이다.

⑤그것은 아나나르탐이다. 곧 이원론적이 아니다.

순야타는 순야에서 파생되어 나온 추상적인 명사이다. 그것은 상실을 의미하며 가득 채우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순야와 순야타라는 말들은 스바바바란 말과 관련되어 생각할 때 가장 옳게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스바바바란 말은 글자대로 풀이하면 「고유한 자신의 존재」를 의미한다. 찬드라키르티(Candrakirti)는 이 단어가 불교철학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사용되어져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1)사물의 특별한 성질이나 혹은 본질, 예를 들자면 「열은 불의 특별한 성질로서 곧 스바바바이다」

이하 요 다르모 얌 파다르탐 나 비아비챠라티, 사 타스야 스바바바 이티비아파디스야테, 아파라프라티받닽바트

Iha yo dharmo yam padārtham na vyabhicarati, sa tasya svabhāva itivyapadisyate, aparapratibaddhatvat

이 세계에는 언제나 사물과 함께하는 속성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사물과도 명백하게 관련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물의 특별한 성질, 스바바바로 알려져 잇다.(P.P.105)

(2)고유한 존재(스바바바), 곧 다른 존재와 반대되는 존재로서 사용되어져 왔다. 얀드라키리티는 「스보 바바하 스바바바 이티야스야 파다르타스야 야다트미얌 루팜 탙 타스야 스바바바 이티-Svobhāvah svabhava itiyasya padārthasya yadatmiyam rūpam tat tasya svabhava iti- 스바바바는 고유한 존재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다.」(P.P.p.115)라고 말하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아크리드리마하 스바바보 히 니르아펰사하 파라트라 챠 Akrtrimah svabhavo hi nirapeksah paratra ca-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발생되지 않았고, 생산되어지지 않았고, 의존되어지지 않았고, 그 자신외에는 관계가 지어지지 않았고, 우연적이 아니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진실로 고유한 존재, 스바바바이다.

마디아미카는 스바바바의 첫 번째 의미를 거부하고, 오직 두 번째 의미만을 받아들인다. 챤드라키리티는 「크리트리마스야 파라시펰사스야 챠 스바바바트밤 네스탐- Krtrimasya parasāpeksasya ca svabhāvatvam nestam-우리들은 우연적이고, 다른 어떤 것과 관련되어서 발생된 스바바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의미는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스바바바가 사물의 고유한 본질적인 성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적(Krtrimā)이고 상대적(Sāpeksa)이기 때문이다. 비록 열이 불의 특별한 성질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대단히 많은 다른 조건들- 예컨대 성냥, 렌즈, 기름, 혹은 두 개의 나뭇가지들의 마찰 등-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 첫 번째 의미는 단어의 가장 높은 의미에 있어서 스바바바<고유한 성질>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스바바바가 될수 있는 단어는 꼭 한가지 단어밖에 될수 없으니, 그 단어가 곧 절대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다른 모든 것<현상>들은 상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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