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 보현행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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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길 보현행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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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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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나는 부처님공덕의 실현자 보현행자가 되리라

보현행이란
일반적으로 중생구제의 자비행을 보살행이라 하고 보살행의 이상형을 보현행이라고 한다.  보현행에 대한 상식적인 정의와 이해하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음을 살펴야 하겠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자타(自他)가 모두 함께 성불하는 것’이라고 할 때 깨달음으로 귀착되지 않는 그 어떤 가르침과 실천도 불교일 수 없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보현행도 깨달음의 길로 인식될 수 있을 때만 불교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현행은 중생구제의 길인가.  깨달음의 길인가.  그것은 하나의 길인가.  다른 길인가 하는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 선행되어져야 한다.
불교 기본정신으로 볼 때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올리는 길이 아닌한 그 어떤 좋은 일도 불교적인 중생구제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중생구제의 보현행을 깨달음의 길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옳다.
나아가 보현행이 중생구제의 자비행으로만 이해되고 깨달음의 길로 인식되지 않았던 점 그리고 깨달음의 길과 중생구제의 길을 하나의 길로 파악하지 못한 점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은 깨달음의 행이요, 깨달음의 행은 부처의 행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보현행이 바로 깨달음의 행이 되도록 하려면 면밀히 살려야 할 것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째 불교세계관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유형무형의 그 어떤 것도 고정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의 관계를 떠나 홀로 있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화엄경]에서는 세계를 설명할 때 깨달음의 주체인 불보살의 생명의 주체인 중생과 공간의 주체인 대자연이 평등한 가치와 자격으로 상호불가분의 관계 윙에서 활동이 전개된다고 한다.
영원한 하나의 큰 길, 그것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있음이다.  나만의 길은 곧 죽음의 길 파멸의 길이요, 더불어 함께 하는 길만이 삶의 길, 창조의 길임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고대로부터 상호관계의 작용이 너무나 심오하므로 불가사의한 연기 또는 부처•세계•중생이 모두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체의 모든 존재가 일심동체의 연기성임을 통찰하는 문수지혜의 눈과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현행의 발원이 불이(不二)적 관계가 될 때 중생구제의 길과 깨달음의 길은 하나의 길이 되고 나아가 참된 불교가 될 것이다.
둘째, 일심동체의 연기론적인 불교세계관에 입각해서 살펴보면 인간을 떠난 세계, 세계가 없는 인간, 정신을 떠난 물질, 물질 없는 정신, 어 없는 나, 나를 떠난 너란 있을 수 없다.  일심동체로 표현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중생구제의 보현행이 결코 누구를 위한 희생 또는 헌신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굳이 말한다면 자신의 본래면목을 드러냄이요, 여래의 공덕에 수순함일 뿐이다.
청량국사께서는 ‘오로지 아궁이 안의 다른 나무가 잘 타도록 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애쓰노라면 어느 사이에 부지깽이도 다 타버리고 말듯이, 연기론적 임심동체의 세계관으로 자타가 함RP 성불하도록 몸과 마음 바쳐 정진을 계속 하는 그 자체가 보현행이요, 깨달음행이요, 부처의 행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이와 같은 이치를 경전에서는 육바라밀중 보시바라밀을 예로 들어 ‘조건 없는 보시, 사심 없는 보시[無住相布施]만이 깨달음의 길이요 중생구제의 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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