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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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풀기
  • 관리자
  • 승인 2009.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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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ᐧ 가정ᐧ 행복의 장
 
‘한’. 한문으로 ‘恨’이라고 쓰기보다 한글로 한이라고 쓰면 더 실감이 난다.  우리문화에서 한은 우리민족의 교유한 정서라고도 일컬어질 만큼 보편적인 정서다.  상담실이나 정신과 상황이 아니더라도 서로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반인들 사이에 곧잘 원인이 ‘한이 맺혀서 그렇다’는 진단을 잘 내린다.  우리 전통의서인 [동의보감]에 이런 사례가 실려 있다.
‘어떤 여인이 약혼한 뒤에 그 배우자가 장사하러 나가서 오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그녀가 식음을 페하고 곤와하여 정신이 나간 것도 같고 다른 병증이 없으며 다만 골방 같은 음침한 곳을 택하여 기거하기를 좋아하니 이것을 상념의 과다로 인하여 기결이 된 것이어서 약으로만 치료하여 낫는 것이 아니오, 무슨 기쁜 일이 있어야 자연치료가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사례는 동의보감 곳곳에 여럿 실려 있다.  의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런 사례에 접하면 ‘남편과 헤어져서 오죽했으면 그런 증상이 일어날까……  한이 맺혀서 그런 게지……’ 당장 그런 투로 이해를 한다.  이렇게 맺힌 한이 몇 알의 약으로 풀려질 이치가 없다.
한이라고 통칭되는 이런 정서로 대개 오래 전에 경험이 누적되어 생긴 마음의 응어리다.  좋은 경험이라기 보단 상처가 되는 경험이 누적되어 한이 맺힌다.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생활경험의 누적이다.
하지만 같은 생활경험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한이 맺히고 어떤 이는 대수롭지 않은 생활경험으로 스쳐지나간다.  그만큼 한은 개인차이가 있다는 뜻도 되겠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을 수 없다’는 표현도 간간히 듣게 되는데 다분히 주관적인 느낌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이런 주관에 연관된 감정은 보편적인 것도 있지만 보편성과 거리가 먼 것도 더 많다.
사실 한이 맺힐 정도의 생활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을 벗어나 이젠 성취한 경험을 지니는 사람에게도 한은 역시 한으로 남아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객관적인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젠 한과는 거리가 멀어야 할 텐데도 아직까지 한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본다.
이토록 오랜 배후조종자로 남는 한은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아동기의 감정양식과 대단히 유사하다.  성년이 되어 행동하는 모든 행동양식이나 사고 감정판단 등의 양식은 기실 그 개인이 아동기에 어떻게 부모로부터 다루어지면서 양식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이런 양식화 뒤에 숨어 개인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조종하는 핵심감정이 부정적으로 뭉쳐 있으면 그것을 한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대개 이런 한은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보단 한을 맺게 만들어준 외부사람이나 환경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집살이를 심하게 해서 한이 맺혔다거나 가난이 너무 지나쳐서 돈에 한이 맺혔다거나 부모를 사별해서 오매불망 그게 한이 맺혔다는 등의 설명을 한다.
그래서 대개는 ‘억울하다’는 감정이 기본을 이룬다.  ‘억울하다 못해 분하다’는 감정도 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해 우울하다’는 감정도 있다.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증상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증상조차도 따지고 보면 개인의 한으로부터 출발한 공격성을 은폐하지 못하고 의식수준으로 노출되면서 발생한다.  공격적 분노를 무의식 속에 억압하는 심적기제를 철저히 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불완전한 방어를 뚫고 의식화되려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불안과 초조로 변한다.
흔히 ‘화병’이라고 통칭되는 이런 형태의 증상복합은 대개 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한이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민족이나 종족적인 고유한 감정양식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한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특유의 감정양식이 우리나라를 제외하곤 세계의 어떤 종족에서도 볼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한민족 특유의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비근한 주장들은 민중의 역사적인 계층의식이나 정동체협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란 주장도 있고 오히려 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가령 자신으로서는 넘지 못할 숙명적인 힘에 의해 좌절되는 것은 개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항변도 있다.  한은 불의부당한 일자로부터 발생하여 그래서 개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한은 장기적인 쌓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지 지금 당장 갑자기 쌓이는 것은 아니다.  한은 가랑비에 오래 젖어 생기는 것이지 소나기를 맞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이 맺히는 근원적인 상황을 보면 객관적으로 보기엔 하찮은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아주 사소한 상황을 장기적으로 불완전한 억제를 통해 자신을 방어해오다 보면 어느 덧 장기적인 불완전성 때문에 쌓이고 쌓인 감정의 응어리가 풀지 못하는 암 덩이로 남는다.  신체적인 암세포가 처음엔 아주 적고 국소적이지만 대단히 치명적인 것으로 번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암세포가 건강한 세포의 힘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나 같다.
한도 처음엔 사소한 생활경험의 불완전한 억제로부터 출발하여 별것 아닌 것처럼 쌓이지만 바로 그 감정이나 감정양식 때문에 개인의 정신적 통합기능을 잃게도 되어버린다.  ‘기나긴 아픔의 축적으로 가라앉혀진 음기’란 표현을 쓴 문학가도 있다.
자 이런 한들은 사실 개인의 인격발달 과정 중에서 어느 단계의 상처 때문에 개인의 한으로 남는 감정양식이란 점에서 명백하며 또 한 종족이 현재까지 살아남아 이어오기까지 체험하는 종족적으로 집합적 감정양식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들이 지배적이다.
한을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개인이나 민족의 보편적 감정복합으로 그리고 그 자체를 우리 심성의 아케타잎으로 보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언젠가 학자출신의 한 재상이 취임사에서 ‘굽은 것은 펴고 맺힌 것은 풀어가면서’란 표현을 쓴 게 있다.  맺힌 것이 한이라면 푼다는 것은 치료적 의미를 지닌다.  어떻게 풀어볼까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지만 대개 노력해도 안 풀린다거나 지울 수 없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사실 한은 지우개로 지우듯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도 않으려니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문제는 흔적은 남아도 그 흔적이 핵심감정을 이룰 만큼 ‘음기의 덩어리’가 아니도록 희미하게 만드는데 있다.  흔적은 있어도 영향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이 맺히면 흔히 두 가지 형태로 반응하기 된다.  하나는 가장 흔한 것으로 적개심이나 분노 좌절감을 자신에게 내재화시킴으로써 홧병의 증상을 일으킨다.  둘째로는 분한 마음이나 증오를 성공의 원동력으로 삼아 새로운 성취를 전환시킨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동기가 바로 적개심의 전환사례다.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만드는 한풀이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나 주변에게 또 다른 한을 심는 한은 쳇바퀴 구실을 한다.  동기화시켜 새로운 성취를 이루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사회가 용납하는 또 다른 성취를 통해 승화시키는 힘은 전자보단 훨씬 힘이 든다.  하지만 그런 힘을 쏟은 결과는 달다.
‘마음이 원래 없는 것인데 없는 마음에 무엇이 맺히랴’싶은 높은 불가의 마음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한은 처음부터 맺히지 않으련만……  싶지만 어디 그게 우리 같은 범인에게 말로서 이루어질 경지인가 싶다.  승화로 바꿀 수 있는 힘만 있어도 범인에겐 건강한 정신이다.
한은 가혹한 스승이기도 하고 가혹한 파멸자이기도 하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마치 보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과 같다.'고 설파한 괴테의 경구를 새겨봄직하다.    <불광>
이화여자대학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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