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의 참뜻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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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의 참뜻을 되새긴다
  • 관리자
  • 승인 2009.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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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彌勒經典의 世界

출가의 참뜻을 되새긴다. 반영규

이달의 언어

운명의 주인이 되는 자

우리의 본신은 육신이 아니라 진리 몸인 것을 믿자. 생명을 타오르는 진리의 불꽃을 언제나 자신의 생명에서 보자. 그리고 마음에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자.

여기에서 자신의 운명은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다. 인간을 육체이고 물질이고 환경조건의 종속물로 생각하는 유물론적 열등감을 마음 밑바탕에서부터 소탕하자.

우리의 마음이 진리로 충만될 때 우리는 새사람으로 탄생 한다. 자주적이며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자신이 된다. 운명적인 환경 조건에 종속했던 타성에서 벗어나 운명을 지배하고 역경을 타개하며 일체 환경에서 자주권을 행사하는 참된 자기 회복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자신과 환경을 밝히는 주인이다. 직장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중심이며 태양이다. 온갖 행운과 성공이 그에게 모여 든다.

韓國虎畵展

小巖 文世寬 篇

한국(韓國) 호랑이는 개국신화(開國神話)를 비롯해서 전설(傳說)이나 민담(民譚) 속의 주인공이었으며 민화(民畵)와 풍속문학(風俗文學)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왔다.

또 전설 속의 호랑이는 사나운 호식형(虎食型)도 있지만 순진한 어린이와 노인(老人)은 해치지 않는다는 인후(仁厚)한 보은형(報恩型)이 많고, 지(智)와 용(勇)을 겸비하여 늠름한 기상(氣象)이 넘치면서도 우직(愚直)하리만큼 온순한 것이 더 많다.

소암(小巖)은 이러한 한국 호랑이의 動的인 미를 표현하므로써 한국화(韓國畵)의 새로운 국면(局面)을 추구해 보겠다는 의지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호랑이는 우미(優美)하고 맵시있는 몸매에서 재빠른 속력감과 동세(動勢)를 느낄 수가 있다.

파문(波紋)져 있는 아름다운 리듬의 선(線), 과장된 발과 입, 류려(流麗)한 피부 아래로 발달된 근육의 단층(斷層)등 길고 우미한 선(線)일지라도 그 형태에는 거대한 양감과 힘이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고요한 산수(山水)에만 집착해오던 한국화(韓國畵)의 새로운 가능성(可能性)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 라고 하겠다.

또 철사처럼 가늘고 세련된 짙은 묵선(墨線)으로 붓의 속도와 방향, 선의 태세(太細)등의 변화를 교묘히 다루어 나가면서 선으로 동세를 표현하는 백?법(白?法)이 주가 되어 있다. 그리고 백?법(白?法)에서 느껴지는 딱딱하고 메마른 듯한 느낌을 중화(中和)시키기 위한 수법으로 담묵(淡墨)으로 된 배경을 대답하게 농묵(濃墨)으로 처리하는 파필법(破筆法)을 곁들이고 있는 표현도 재치있는 처리이다.

소암 미술원

763-4464

762-4468

약력(略歷)

강원도 속초생

서라벌예대

도전 특선

대한교육대상전 특선

현대미술 대상전 특선

국립공보관 초대출품

한국국민예술원 이사

개인전 3회

한국호화전

(서울 덕수미술관)

한일친선미술교류전 출품

한중 동양화 연합전

현미전 특별상

전통미술 대상전 은상

한중서화가협회 위원

한국자연회 운영위원

한국화협회 위원

한국현대미술대상전 운영위원

불광(佛光)은

순수 불교에 의거한 인간 정신을 정립하고

숭고한 인간 가치를 구현하는 명예로운 역사 창조를 추구하며,

회원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 교양지의 책임을 다 한다.

권도언

정심(淨心)으로 소망을 이루자

우리는 소망으로 산다. 소망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 소망은 인생의 등불이다. 실로는 생명을 비추는 빛인 것이다. 그래서 소망은 마땅히 크고 밝고 항상 싱싱하게 타올라야 한다. 소망의 불빛이 가슴에 넘치고 말과 행과 생각과 표정으로 퍼져 나와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소망이 될 것인가. 참된 소망은 자기 향상이며 자기 성장이다. 이웃을 돕고 사회를 밝힘이다. 스스로 건강하고 지혜롭고 덕스러우며, 가족이 건강하고, 가정이 화평한 것이다. 사회가 평화롭고 국가가 번영하며, 세계와 중생에 기쁨이 함께하고 진리의 빛이 그 사이에 가득함이다. 거듭 말하면, 우리의 소망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지만 그 모두는 내가 향상하고 이웃이 행복하며 세간이 평화롭고 역사가 진리로 발전함에 있는 것이다. 경의 용어를 빌리면, 정토를 장엄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금강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니라……』

이 대문은 보살이 어떻게 정토를 장엄하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많은 소망을 구름처럼 일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금강경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게하는 명쾌한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천근의 무게를 가진 엄숙한 훈계의 말

씀으로 들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망을 가지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마땅히 그 마음에 한 물건도 둠이 없이 허공처럼 말끔하여야 하는 것이다. 형상이나 어떤 경계나 거기서 얻어지는 어떠한 평가나 감상에도 머무름 없는 말끔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한 물건 두지 아니한 말끔한 마음에서 비로소 불국정토의 청정장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환경의 좋고 나쁨에 마음 두지 않고 미움도 원망도 슬픔도 내지 터럭끝만한 대립도 두지 아니한 청정 본심 그대로의 마음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소망들은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시다.

그런데 오늘날 수 없는 소망의 구름을 몰고 가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형상을 보고 마음을 내며 감정을 일으키고 다시 평가하고 비판하고 편당을 짓지는 않는가. 결코 대립한 사람은 없는가. 미움도 원망도 슬픔도 쓰림도 원한도 절망도 없다 할 수 있을까. 실망의 무거운 그림자를 붙들고 슬픔에 가슴을 내어 맡기고 있지는 아니한가. 경계따라 기뻐하고, 환경따라 노여움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또는 꾸물대고 있지는 아니한가. 진리의 크신 광명 속에 그 생명이 뻗어 나가고, 온 천지 산하대지와 온 이웃 형제들을 부처님의 크신 자비은혜로써 감싸고 있는 것을 몰라보고 있지는 않았던가. 부모님과 조상님과 수 많은 성자들의 자비로운 은덕이 내 생명에 맥박치고 있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았던가. 약간의 성공을 거두면 자기 공으로 삼고 욕망이 차지 않으면 이웃과 환경에 책임을 돌리지 않았던가. 돌이켜 볼 때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가슴 깊이 도사리고, 몸과 말과 뜻으로 끝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대어 그 가슴, 그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땅히 이와같이 그 마음을 청정히 하라。 형상과 일체 경계에 물들음없는 마음을 내라。』

하신 부처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러고서는 정토 장엄을 이룰수 없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정토장엄의 소망을 발한 우리들은 먼저 그 마음에 오고가는 일체 대립 감정, 미움과 원망, 슬픔과 절망, 고통과 고독감……. 그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숨김없이 드러내고 참회하여야 할 것이다. 아집과 망견과 미혹으로 집착하고 교묘한 합리(合理)의 보자기로 겹겹이 싸아 두었던 그 모두를 풀어 부처님 앞에 발로(發露)참회 하여야 하겠다. 지금 가슴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모든 허물을 참회하고 모르고 범한 것까지도 함께 참회하여야 하겠다. 그 감정이 청정하고 그 마음을 청정히 하였을 때 비로소 청정광명 여래공덕은 내 생명에 빛나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도, 정토장엄의 발원도, 그 모두가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이유를 들어 대립을 합리화하고 원망을 보존한다면 그것은 삼독의 과실을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화로 속의 찬 돌이며, 하늘을 덮은 검은 구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코 공덕의 햇빛은 비춰오지 않고 소망의 과실은 여물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소망을 심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소망의 싹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마음에 있는 온갖 장애물, 온갖 감정과 미혹의 덩어리를 일시에 소탕하여야 할 것이다. 정토장엄을 발원하면서 다시 한번 보현행원품 참회 정진의 깊은 뜻을 생각한다.* (광덕)

추녀 끝에 달려 있던 작은 풍경, 그 맑은 소리로 씻은 듯이 나았던 나의 봄벌미……

영약(靈藥)

정채봉

「봄이 오면 비둘기 목털에 윤이 나고 썩은 말뚝도 푸른 빛이 되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은 대개 이렇듯 봄을 다 찬양한다. 그러나 내게는 심하게 봄멀미를 앓은 한 해 봄 기억이 있다.

대학입시에 실패했던 해, 「가장 잔인한 달」을 실감하며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그때 그 기차가 서울역을 떠나는 시간이 23시 30분인 것에 감사했다. 자정에 서울을 벗어나는 것, 아침해가 뜰 무렵에 순천역에 도착하는 것, 이 얼마나 맞아 떨어지는 시간대인가 말이다.

그러니까 어둠의 터널을 뚫는 광부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리밭이 푸른 들녘에서는 내가 파 들어간 어둠 저 편의 찬란한 아침해를 가슴에 안아 들일 수 있겠다고.

그러나 그 해 봄에는 순천역의 아침조차도 생각보다 훨씬 늦게 나타났다. 봄비에 젖고 있는 역 구내의 벚꽃나무도 쓸쓸해 보였다.

그 가슴 저미는 봄멀미 증세는 벚꽃이 눈처럼 떨어져 있는 물 웅덩이를 지날 때에 나타났다. 백운산 기슭에 있는 작은 소(沼)를 지날때는 더욱 심했다.

나는 그때 그 소에 뛰어들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그 투명한 물에 몸을 담그면 소는 더욱 푸를 것 같았다. 내 마음의 잉크 빛깔 보다도 진한 멍이 풀려 들 것이므로.

백운산을 오르는 길섶에는 진달래 꽃망울이 한창 부풀고 있었다. 새 풀은 찾아 기웃거리는 산토끼들, 그들의 발걸음은 빨랐으나 내 발은 무거웠다. 땀을 비오듯 흘렸고 목이 계속 탔다.

친구들은 하산할 것을 권했으나 나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을 오리쯤 남겨둔 상백운암(上白雲庵)에 이르러서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암자에는 탁발을 나갔는지 아무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암자의 남쪽을 향한 쪽마루 위에 누웠고, 친구들은 빨리 돌아오겠다며 정상으로 떠났다.

나는 아스라이 이내에 묻혀 있는 다도해를 내려다 보다 말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때 비몽사몽간에 영롱한 어떤 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고 찾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도 눈을 감으면 가물가물 들리는 소리…… 인기척 하나 없는 곳의, 솔바람 소리에 어울리는 소리 ……. 그것은 허식과 미움과 절망을 내 안으로부터 말끔히 쓸어내리는 영혼의 소리였다.

그 소리 속에서 흠뻑 잠을 잤다. 그리고 맑게 깨어나면서 보았다. 추녀 끝에 달려 있는 작은 풍경을. 그 풍경의, 어쩌다가 바람이 지나면서 흘리는 그 소리 영약으로 씻은 듯이 나았던 나의 봄멀미. 지금도 나는 이일 저일로 산다는 것이 괴롭게 느껴질 때면 그해 봄 상백운암의 풍경소리를 생각해 내서 힘을 얻곤 한다. * (월간「샘터」편집장)

옷차림

윤종혁

봄이 이 땅에 다시 찾아들면 불가에선 당연히 음 四월 초八일, 석가모니 부처님 오신 날을 생각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마음과 몸을 정결히 가다듬어 이 날을 기쁘게 맞이하여 석가 탄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자못 흥분하기도 한다. 아울러 불자를 비롯하여 기타 일반 사람들도 산과 들에 푸릇 푸릇 돋아나는 나뭇잎과 분홍으로 물들여 주는 진달래 꽃, 노랗게 수놓아 주는 개나리꽃을 즐겨 감상하며 어느덧 지나간 엄동설한을 잊어버리고 두툼하고 거북스러운 겨울 옷을 벗어던지고 가볍게 몸맵시가 드러나 보이는 옷차림으로 변장을 하게 된다. 옷은 계절의 기온의 높낮음에 맞추어 적절히 입게 마련이고 일년 춘하추동 사(四)계절중에 아무래도 봄 가을이 겉멋을 부려 보기에는 가장 적당한 시기라 보겠다. 지나치게 추운 겨울이나 아울러 지나치게 더운 여름철은 제 멋을 옷으로 나타내기에는 마땅치 않은 것으로 안다.

사람 됨됨의 정도를 가늠해 볼 때 관상, 수상, 족상, 골상 등 그 겉으로 풍기는 면을 보는 각도가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보여 주는 언행에서 나타나는 심상(心相)이 제일 으뜸가는 평가 방법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겉보다는 속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겠다.

봄철이 되었으니 나들이엔 진솔을 입어야 되겠고, 특히 파티, 리셉션 모임엔 꼭 옷은 진솔을 입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느끼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으려는지, 특히 여성들쪽을 향해서 묻고 싶은 질문이다. 때때로 4, 5세 밖에 되지 않은 애들을 성숙한 성인의 옷차림으로 등장시켜, 이런 경우 진솔옷이란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때묻을까봐 부자연스럽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애는 옷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심신의 지장을 주고 있을 것이라 짐작이 가기도 하며 어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엔 방금 양복점에서 사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 더구나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직물 무늬의 옷차림은 만나는 이의 시야를 거북스럽게 함은 물론이려니와 더구나 그런 옷을 입고 나타난 상대방의 거동이 이디 좀 때가 묻을까봐 먼지라도 묻을까봐 앉을 때 설 때마다 털고 만지고 하는 시늉을 볼라치면, 상대편에 대한 처신과 대화가 경직되게 마련이고 의사소통이 신속하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겠다.

하기야 떠러진 신발에 터진 옷차림이면 어떠냐 하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일부러 거기짱을 부리는 술꾼들의 농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일로서, 아무튼 술좌석, 음식점 등 여럿이 모인 장소에서 국국물이 튀었다고 술잔이 엎어졌다고 그래서 옷을 버렸다고 소동을 피울만큼 아까운 진솔 옷을 입고 다닐 필요는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모처럼 새옷을 입고서 그런 언잖은 경우를 당하였더라도 진솔이 아닌 양 털털 털고 닦아 버리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에서 참된 인간미, 멋을 찾게 되기 때문이라 하겠다. *(홍익대학교 문리대학장)

풍요로운 마음으로

안장환

내가 농촌 태생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농촌을 사랑한다. 그래서 답답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나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무작정 멀리 농촌을 한번씩 돌아오곤 한다. 그저 차창 밖으로 지나치면서 보는 농촌 풍경이지만, 눈에 덮인 마을이라든가, 들판과 얼어붙은 개울은 내 고향과도 같은 친근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농촌을 한번 돌아오고 나면 며칠씩 내 머리 속에는 풍요로움이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 나는 또 하나의 다른 풍요로움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강에 날아온 물오리떼들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약간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잠수교를 통과하는 좌석버스를 이용하는 습관이 생겼다.

잠수교는 한강에 가로놓여 있는 다리중에서 가장 낮은 다리다. 그래서 그 다리를 지나노라면 아주 가까이서 놀고 있는 물오리떼들을 볼 수가 있다. 아침마다 그 물오리들은 수십 마리씩 떼지어 몰려와서 물 위를 헤엄치거나, 물 속으로 곤두박질을 치면서 즐겁게 놀고 있는데, 그 빛깔까지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신비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물오리떼들을 구경한다. 그런데 어떻게해서 물오리떼들이 그 더럽고 오염된 한강에까지 날아드는 것일까. 그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어쨌든 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그 신기한 자연을 맛보며 산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제 우수(雨水)도 지났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찾아와야 할 봄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화사하고 싱그러운 그 봄을 맞을 채비를 하며, 이 봄에는 무언가 다하지 못한 일들을 성취해야겠다는 기대에 들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창밖에서 불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실비 젖는 소리

임신행

이른 봄, 실비가 내리면 나는 연한 가야금 소리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린다. 그림은 실비가 내리는 벚꽃의 도시로 가는 진해 장복산 산허리를 스케치한 것이다. 이 그림의 산허리에는 엷은 연두빛이 비치고 길을 따라 하얀 벚꽃이 산안개와 함께 간략한 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4호 크기의 그림 속에 실비는 내린다. 그 실비 속에 여린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그림을 주신 분은 지금은 독일 푸랑크푸르트에서 창작 생활을 하시는 김 정 화백님이다. 이 그림은 내가 소장하게 된 것은 80년 봄이었다. 김 정 화백님이 작은 가방 하나를 챙겨서 실비를 앞세우고 마산엘 불쑥 나타나셨다. 마침 진해의 벚꽃이 일기 시작하는 터이라 그쪽으로 산책을 나섰다. 진해로 가는 장복산 산허리는 실비 속에 더 활활 타는 진달래 꽃불로 한창이었다. 김 정 화백님은 실비 속에 타는 진달래 꽃불을 보시고,

『아 비 속에 타는 꽃불이군요.』

하시고는 스케치북을 꺼내시어 실비에 젖어 활활타는 장복산의 진달래 꽃불을 옮겨 담으시었다. 연필 끝에 일어서는 장복산 산허리와 타오르는 꽃불은 순식간에 담으셨다. 그때 나는 <꽃불 속에 올리는 방울소리>의 작품 배경이 바로 이 산이라는 말을 해 드렸다. 길 가 즐비하게 늘어선 벚나무가 일구는 하얀 솜사탕같은 벚꽃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해 마지 않았다. 차창 밖에는 여전히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구름을 두른 듯한 벚나무에도, 빨갛게 빨갛게 타는 진달래 꽃불에도 실비는 내리고 있었다. 터널을 지나 내려다 보이는 벚꽃의 도시 진해가 동화의 나라처럼 실비에 젖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벚꽃 터널을 뚫고 나가듯 실비 내리는 벚꽃숲을 굽이굽이 돌아서 갔다. 벚꽃동산 제황산을 올랐다. 온통 벚꽃, 불꽃이었다. 실비는 가야금 소리는 내며 내리고 있었다. 김 정 화백님은 실비가 젖는 벚꽃 나무 아래서 스케치를 하셨다. 신명들린 사람처럼 스케치를 하셨다. 화폭 속에 새하얀 벚꽃과 산허리를 휘감은 물안개가 아름다웠다. 실비는 그 물안개에도 젖었다. 실비가 퉁기는 연한 가락도 그 화폭에 스며들었다. 김 정 화백님은 실비속으로 떠나시더니 벚꽃이 하얗게 핀 장복산에 젖는 실비가 담긴 그림 한 폭을 보내 주셨다. 나는 실비에 젖을 때마다 김 정 화백님의 강한 모습과 함께 연하디 연한 실비의 가락을 듣는다. 실비 젖는 소리는 살아있는 모든 사물에게 내려주는 생명의 멧세지다.

삼월이 오면 나는 실비에 흠뻑 젖고 싶다. 허약하고 가난한 내 가슴에 사랑이라는 멧세지인 실비를 담고 싶다. *(작 가)

*청소년 불교강좌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습니까

김재영(「보리」誌 주간)

▨ 이 글은 고등학교 2학년생, 선재와 선생님과의 문답이다.

▨ 이 목숨 마칠 때까지

󰃅 선생님, 하루의 삶을 염불로 시작하고 염불로 이끌어 가자고 하셨는데, 염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맹목적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이나「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운다고 재난이 소멸되고 복을 받는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 불교는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수행이 과연 법(法)다와야 하는 것입니다. 2법답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로 우리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맞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하기를 권유하는 것은 그것이 불자의 삼대행로인 믿음〔信心〕을 키우는 훌륭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 불교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는 자신의 힘〔自力〕으로 성불을 추구하는 자력신앙를 그 본질로 삼는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불교가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다면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 문제의 핵심을 잘 지적하였습니다. 「불교가 자력이냐, 타력이냐? 부처님이 신이냐, 아니냐?」하는 논의는 매우 뿌리 깊고 심각한 것이며, 오늘의 한국 불교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할 교학상(敎學上)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점을 먼저 해명하려 합니다. 첫째, 불교는 기독교보다 적어도 6, 7백년 선행하여 훌륭한 믿음의 종교로서 스스로 발전해 왔다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둘째, 깊고깊은 믿음은 우리들 최고의 염원인 성불(成佛)을 실현하는 하나의 모체가 된다는 교학상의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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