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사와 아미산 만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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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사와 아미산 만년사
  • 관리자
  • 승인 2009.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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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찰기행⑤ 사천성 낙산

1991년 8월 3일 (토) 개임

어젯밤에도 비가 왔는데 아침엔 씻은 듯이 갰다. 정녕 희한한 성도의 날씨여서 공연한 걱정을 삭혀 주었다.

7시 금우회관 마당에 모인 세미나 회원들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가뜬한 차림으로 각각 4대의 버스에 나뉘어 탔다.

성도평야를 달려 10시에 미산(眉山)에 도착, 북송(北宋)의 대문호 소순(蘇洵)과 그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의 사당인 삼소사(三蘇祠)에 들어가 그 영상에 재배를 올렸다. 워낙 소식[東坡]의 옛집이라 짐짓 구석 구석을 두루 살피고 연못가의 동파좌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특히 교묘히 꾸민 목가산당(木假山堂)이 퍽 바자로웠다.

진작 문화혁명 때 개개졌을 줄로 알았는데, 손을 덜 탄데다 걸맞게 간수된 아담한 삼소사였다. 뒷곁의 대숲길을 걸으며 『적벽부(赤壁賦)』를 웅얼거리니까 남경사대 상국무(常國武) 교수가 따라 읊는다. 음은 달라도 성조가 비슷해 자못 흥겨웠다. 비림(碑林)에는 거의 복사의 복각이었지만, 그런대로 솜씨가 호젓해 진적 못지 않았다.

거기서 나와 다시 버스로 12시 반에 낙산(樂山) 대불사(大佛寺)에 도착, 자그만치 73미터의 대불좌상을 우러러 보기 위해 사다리 계단을 오르내리며 보아하니 하도 엄전해서 합장도 잊고 감탄했다. 능운산(凌雲山) 기슭의 바위벼랑을 통째로 깎아 쪼아내길 무려 백년만인 서기 803년에 완성했다는데, 두상의 지름이 10m의 대불이다. 문득 우리나라 월악산 입구의 균형 잃은 미륵상이 상기되어 지레 머리가 숙었다. 더욱이 민강과 청의강과 대도하의 3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소해서 영험을 보았대서 더했다.

2시 대불사 찬청에서 점심을 들고 동파루(東坡樓)를 거쳐 문화혁명 당시 인민 시성으로 받들린 두보를 숫제 반동과 지주로 매도하고 이백으로 바꾼 문제의 저서 『이백과 두보』(1971년간)의 저자 곽말약(郭沫若)의 고향이 저 강 건너라서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이윽고 산마루의 13층 백탑(白塔) 법당 앞에서 예불을 올렸다. 그런데 관광객은 줄을 이어도 예불자는 드물다. 소지와 분향하는 이가 없어 다소 안쓰러웠다. 대불사에서 내려와 청의강의 유람선을 타고 낙산 건너로 가다가 강심에서 5분 동안 쉬어 대불의 참모습을 바라보라며 사진을 찍으란다. 한결같이 합장을 하며 탄성을 올린다. 실로 거대한 대불의 거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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