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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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詩
  • 관리자
  • 승인 2009.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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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시심

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선(禪)과 문자를 빌려서만이 표현이 가능한 시(詩)를 과연 같은 궤도에 올려놓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어찌 보면 서로 상반되는 현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같은 자리에 놓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선이나 시가 모두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선행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깨닫기까지는 시에서 선의 방법을 구해 오는 것이고, 깨닫고 나서는 선이 시에서 표현 방법을 빌려오는 셈이다. 즉, 말을 거부해야 하는 선의 묘오(妙悟)로서도 할 수 없이 말을 해야 한다.

이 때 이 깨달음의 상(想)인 선상(禪想)이나 시상(詩想)의 표현에 가장 거리가 가까운 것이 시이다.

그러므로 선이나 시는 조화롭지 않은 듯 하면서도 조화롭고, 논리가 없는듯하면서도 논리가 있고, 목적이 없는 것 같으면서 목적에 들어맞는 것이다. 그것은 선이나 시가 다 만유(萬有)의 생명의 실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생명 그 자체는 논리를 가지고 된 것도 아니고 어떤 목적이 꼭 있는 것이 아니지만, 논리에 맞는 것이고 목적에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시에 있어서는 본바탕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법칙을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것이 되는 것을 일러서, 사다리 없이 언덕에 오른다〔捨筏登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다리는 방편이나 도구를 마하는 것이고 언덕은 구경의 목적지 즉, 깨달음의 경지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경지에서 본다면 시와 선이 같다. 다만 이 깨달음의 경지를 시가(詩家)에서는 조화의 경지라 한다.

이런 점에서 청(淸)나라 때 학자 왕 사정(王士禎 : 一六三四 ~ 一七一一)은 시에 있어서 신운설(神韻說)을 주장하면서 시와 선은 일치하여 차별이 없다 하였던 것이다.

󰊲 거문고소리는 어디서 나나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로 널이 알려진 송나라의 동파 소식(東坡 蘇軾)은 선과 시를 이론적으로 연결시키기 이전에 이미 선미(禪味)를 담은 시를 많이 쓰고 있다. 그가 삼요사(參寥師)라는 스님에게 주는 시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詩語를 묘하게 하려 하면

텅 비고 고요해지기 싫어 마소.

고요하기에 모든 사물 이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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