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반 키다리 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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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반 키다리 행자
  • 관리자
  • 승인 2009.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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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연이야기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민족 최대의 격난기였던 6.25 당시 내 나이 18세였다. 특히나 감수성이 예민했던 때 아비규환의 초토지옥이 되어버리는 광경을 눈 앞에 보며,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몸으로 겪고, 가족들과의 기약 없는 생이별의 슬픔을 맛보지 않을 수 없는 몸서리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생 끝에 부산에 도달하여 일단은 정착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을 뿐더러 이제부터 무언가 살아가는 방도를 찾아야 했을 그때.마치 갇혔던 봇물이 터져 나오듯 맹렬한 속세에 대한 무상의 감정이 아울러 그 무엇을 목마르게 찾고 있던 상황에서 우연히 신심과 사려가 깊으신 노보살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나의 첫 불가 인연을 부산진구 부암동 선암사와 맺을 수 있도록 애써 도와주신 잊지 못할 은인이시다. 첫 시작은 순조로움과는 달리 그 뒤로 닥치는 일들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문간채에 있는 부목방[속인으로 절 일을 돌보는 일꾼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불가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부목들과 다를 바 없는 육체적으로 힘든 날들이 게속 되면서. 한 번은 나뭇짐이 가득 얹힌 지게를 짊어지고 산비탈을 위태위태하게 내려오다 드디어는 거꾸로 박혀 목뼈가 부러질 뻔 하기도 했던 웃지못 할 일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내일부터는 후원에서 일을 거들라는 행자로서의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졌다. 그 다음날 후원에 있는 부엌에 가 보았더니, 천정에 시커멓게 그을은 대들보와 서까래, 어른 세 사람이 넉넉히 들어앉을 만한 큰 무쇠솥 밥주걱까지도 모두 엄청난 크기였다. 게다가 먼저 와 있는 선배 행자인 듯, 키가 껑충하게 커서 마치 전봇대만한 사나이가 커다란 국자로 무언가를 휘젓고 있다가 나를 보자 드디어 왔구먼 하는 몸짓으로 싱긋 웃으면서 맞아 주었다.

키가 작은 편인 나에게는 엄청 길고 높게 쳐다 보이던 이 키다리 행자야말로 다름 아닌 김지견 박사 그 사람이다. 이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 절의 후원에서 약 2년 동안 공양 짓는 일을 담당하는 노고를 함께 나누는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다. 좁은 후원 행자 방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살며, 정신없이 온갖 궂은일에 몰리면서도 항상 구김없이 웃어가면서 지내는 것이 마치 한산과 습득같다는 평을 들었고, 서로 격려하고 꿈을 키우며 같이 수계하여 선방의 수행생활을 함께하였던 막역지간[莫逆之間]의 도반이 되었다.

그와 함께 보냈던 행자시절.잊지못할 일화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로. 한번은 법회가 있었던 다음날의 일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신도들이 적게 와서 밥이 꽤 많이 남았는데 냉장고 같은 것이 없었던 시대였고 무더위 속에서 하루를 지내고 나자 찬밥이 완전히 쉬어버려 버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행자는 몹시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선배스님들에게 솔직히 말씀드려서 의견을 들을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 되기를 기다려 찬밥을 채소밭에 묻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이튿날 아침 채소밭에 재를 뿌리는 일이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일꾼들에게 들통이 나버렸다.

때마침 밭머리에 포행을 나오신 입승스님이 보시고는 두 행자에게 다가와 웃음을 띠우면서, “산중 한 도인이 상류에 흘려버린 배춧잎 하나를 건지려 무려 십리나 되는 산길을 달려 내려왔듯이 이모든 물건을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소중히 생각하십시오.”하셨다. 입승스님의 그 같은 자비스런 깨우침이 벽력같은 불호령보다 더 가슴에 와 닿았고 뉘우침이 더 크게 일었다.

이렇듯 나의 도반과의 행자시절은 우여곡절 많았으나 아주 사소한 즐거움과 보람까지도 이신동체(二身同體)처럼 모든 고락을 함께하던 단짝으로서의 그가 곁에 있어 큰 힘이 되어주었다. 몸은 고되나 마음은 지극히 순일하고 편안한 가운데 서로가 스스럼없이 흉금을 펴놓고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다정한 벗으로, 대해[大海]같은 포용력이 있어 인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선배로, 한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함께 수행정진하는 도반으로,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만남의 인연이요, 진실로 휘한하고 보람찬 시절의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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