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년간 출입을 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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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년간 출입을 끊나
  • 관리자
  • 승인 2009.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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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고전/禪林寶訓

     1, 덕행이 귀하다

  문정공(文正公)이 낭야(瑯倻)선사에게 말하였다.

 지난 해 내가 여기 왔을 때에 수행인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서  한번은 한 관리에게 물었었다. <이 근처 산중에 훌륭한 스님이 있오?> 그 관리가 대답하였다. <북쪽에 서광사(瑞光寺)가 있읍니다. 거기에는 희(希)·무(茂)의 두 스님이 크게 소문났읍니다.> <그밖에 수행인 중에 인물이 없읍니까?> <유도(儒道)에서는 선비의 높은 행을 귀히 여기고 불문에서는 덕행을 장하게 봅니다. 희 · 무 두 스님은 三十년간을 절 문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옷은 다만 거칠은 베이고 명예나 이익에 관하여는 조금도 마음이 없읍니다. 그래서 이 지방사람은 그의 지조와 행을존중하여 그를 매우 공경합니다. 그는 법좌에 올라 설법할 때에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크게 교화하며 기틀 따라 변재가 걸림이 없이 가이 선지식이라 하옵는데 그의 경계에 대하여는 어리석은 저로서는 알 바가 못됩니다.>

  뒷날 틈을 잡아 희 · 무의 두 스님을 찾아가보니 과연 그 행이 한결같이 앞서의 관리의 말과 같았다. 그때에 내가 돌아와 생각하기를 <옛날부터 이곳은 좋은 풍속이 행하는 곳이라 하더니 이번에 저 늙은 관리를 보건대 능히 군자와 소인을 가려볼 줄 안다. 관리가 저렇거는 하물며 덕을 닦은 선지식일까 보냐> 하였던 것이다.

  서광사·····소주성 안에 있다 하는데 그 절에는 다음 네가지 상서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종과 북이 스스로 울고, 둘째는 보탑에서 광명이 나며, 세째는 푸른 대가 항상 무성하고, 네째는 설법대에 흰 거북이 나와 청법하는 것이다.

     2, 진실한 법그릇

  영원(靈源)선사가 말하였다.

  종산원(種山元)화상은 평생동안 귀한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으며 명리를 도외시하였다. 몸을 낮추어 스스로를 기르고 도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때에 선비들이 그의 출세교화를 권하니 원화상은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진실로 훌륭한 법그릇이라면 어찌 세간에 늦게 드러나는 것을 걱정하리요. 나는 다만 나의 자질이 갖추지 못하였음을 두려워할 뿐이라.>

     3, 행에 힘써라

  영원선사가 말하였다.

  옛 성인들의 말씀과 학문과 도는 이것이 참으로 깨닫기 어려운 것이다. 설사 이미 깨달았다 하더라도 지키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지킨다 하더라도 그를 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내 이제 행하는 때를 당하여 그 어려움이란 깨닫거나 지키는 것을 사뭇 지낸다. 대개 깨달음과 지키는 것은 힘써 정진하되 오직 스스로 자기에만 달린 것이다. 그러나 행은 반드시 마음을 일체에 평등히 하여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자기는 손해보고다른 사람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마음이 평등하지 않고 맹서한 바가 굳지 않다면 곧 손해와 이익이 잘못되어 범속인이 되고 만다. 이것이 참으로 삼가하고 두려워할 바이다.

     4, 명성리양을 끊어라

  영원선사는 도학(道學)과 행의가 순일무잡하고 진실하였으며 덕이 두터워 참으로 옛 도인의 풍모가 있었다.거동이 태연하고 말이 적어서 선비들이 크게 존경하였다.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많은 사람들이 등한히 하는 것을 성인은 삼가한다. 그렇거늘 하물며 총림의 주인일까 보냐. 부처님의 교화를 보아 법을 펴는데 행과 아는 것이 상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뜻을 다할 수 있으랴. 요긴한 것은 때때로 스스로를 살피고 뉘우치는데 있는 것이다. 명성이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결코 마음에 싹트지 않게 하여야한다. 만약 그의 말하는 바가 진실한 바가 아니라면 납자들이 결코 심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생각을 쉬고 덕을 닦으며 수행인이 모이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일찌기 총림의 주인되는 자가 그의 몸가짐이 바를 때 총림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른바 덕이있는 사람의 모양을 보면 사람의 거치른 뜻이 스스로 사그러진다 하였으니 진실로 귀한 것은 이점에 있다 하겠다.>

     5, 믿음과 정성을 다하라

  원오(圓悟)선사가 말하였다

  도를 배우는데 있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서자면 정성이 있어야 한다. 가슴에 정성을 품고 있어야 비로소 대중을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다. 믿음이 견고할 때 사람이 그를 속이지 못한다. 믿음과 정성 둘 가운데 하나만 모자라도 안된다.

    대개 정성이 한결같지 아니한 때는 마음을 능히 보존하지 못하며 믿음이 한결같지 않을 때는 말이 능히 행하여지지 않는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옷과 음식은 없을지라도 정성과 믿음은 없을 수 없다>하였다. 선지식은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오직 정성과 믿음으로 하여야 한다. 만약 마음에 정성이 없다면 일도 또한 미덥지 못하다. 그를 어찌 선지식이라 할까보냐. 그러므로 이르기를 <천하에 오직 지성 하나가 마침내 능히 그 성품을 다하고 능히 그 성품을 다할 때에 곧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한다>하였다. 만약 스스로 자기를 다하지 못하고서 다른 사람이 다하기를 바란다면 대중들은 반드시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기가 먼저 정성스럽지 아니하고 나중에 정성들이겠다고 한다면 대중은 또한 반드시 그를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머리카락을 짜르니 살갖에 이르고 손톱을 짜르니 몸을 침범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생각컨대 정성이 지극하지 않는다면 만사에 감응이 없고 자기를 지극히 덜지 않는다면 이익이 오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정성과 믿음은 잠시라도 내몸을 떠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6, 군자와 소인

  원오선사가 말하였다.

  대개 사람으로서 누가 허물이 없을 수 있으랴. 허물이 있을 때 이것을 고친다면 착하기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옛부터 이르기를 허물을 고치는 것을 현(賢)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대개 허물이 없는 것으로써 아름다움을 삼지 않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많은 허물을 범하게 마련이다. 이점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스런 사람이나 모두가 면하기 어려운바다. 다만 지혜스러운 자는 능히 허물을 고쳐 선(善) 으로 바꾼다. 어리석은 자는 많은 허물을 숨기고 잘못을 꾸민다. 선으로 바꾸었을 때는 그의 덕이 나날이 새로우니 이를 가리켜 군자라고 한다. 허물을 꾸민다면 그의 나쁜 것이 더욱 드러난다. 이것을 소인이라고 한다. 대개 옳은 것을 듣고 자기 행실을 고치는 것은 인정상 쉬운 것이 아니다. 착한것을 보고 즐기고 따른다는 것은 덕있는 사람이 존중하는 바가 된다. 바라노니 그대는 말 밖에서 말 자취를 잊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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