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자소암(婆子燒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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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자소암(婆子燒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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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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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그늘 /무명 스님

  1954년,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일반은 물론 절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스님들 중에 독신으로 살면서 참선수행하는, 그야말로 출가한 스님이 있고, 반대로 출가한 스님이라고는 하면서도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가정생활을 하는, 실제로는 출가한 것이 아닌 스님이 있는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설사 안다 하여도 그에 대해서 그 까닭을 알려고 하지 않고 으레 불교의 승려는 그러한 두 가지 부류가 있으려니 할 뿐이다.  

그러던 것이,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자 독신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비구승과 가족을 거느린 대처승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대처승 제도가 우리 나라의 전통불교를 말살하려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정책 때문에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대처승이 사는 절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던 신도의 발길이 끊어졌다.   대처승과 비구승을 구별하는 신도들의 눈에 대처승은 불공이나 염불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스님으로 비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처승은 대부분이 절 아래 사하촌에 살림을 차리거나 아예 절 안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예가 허다했으므로 불공을 드리고 염불하는 것이 신도를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의 생계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자연히 그러한 절에는 신도의 발길이 끊어진 것이다. 대처승이 종단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총무원장이 절에 사는 스님은 머리를 깎고 먹물 들인 한복을 입고 가족을 절 밖으로 나가 살게 하라고 지시한 것을 보아도 절 풍경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절 안의 빨랫줄에는 애기의 기저귀와 여자의 속옷이 걸려 있는 진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비구승과 대처승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신도들이 비구승을 찿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비구승을 찿는 신도 중에는 비구승의 불교정화운동에 동감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뒤에 신도회를 조직하여 불교정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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