誰許沒柯斧
상태바
誰許沒柯斧
  • 관리자
  • 승인 2008.02.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소설 19

“상감마마께서 위중하시어 저희 절에 쾌유를 비는 기도드리랍시는 분부가 내려 왔습니다.”

원효는 섬칫 놀랐으나 그 표정을 상좌에게 애써 감추며

“언제 분부 내려왔느냐?”

“예 오늘 아침 일찍이 궁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원효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다가

“환후가 어느 정도라는 말씀은 없더냐?”

“식음을 전폐하시었다 하옵니다.”

“음-.”

식음을 폐하였다면 중환이다. 그런데 그토록 중환에 계신 것을 어찌하여 내게는 이제야 알려오는 것일까?

원효로서는 아무래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원효와 분황사에서만 모르고 있을 뿐 황룡사나 다른 절에서는 벌써 며칠 전부터 쾌유를 비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상감이 자리에 눕게 되자 자장법사는 상감의 곁에서 거의 떠나지 않았다.

상감과 종친인 데다가 일국이 불교를 대표하는 승통(僧統)의 지위(地位)에 있으므로 늘 대궐을 무상출입하는 특권(?)이 있는 그는 상감에게 다른 중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상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원효를 시기하여온 자장은 분황사에는 일체 상감의 환후를 알리지 말도록 엄히 분부를 내렸다.

그러다가 지난밤에 춘추공 내외가 문병 차 문안을 드리자 상감은 춘추공의 부인인 문명부인(文明夫人)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회생하기 어려울 것 같소. 원효스님에게 아미타경소를 부탁드렸는데 아마 이귀로는 법문을 들을 수 없을 모양이오. 만일 내가 이대로 가게 되면 내 49재에 원효스님을 법사로 모시어 아미타경 법문을 설하시도록 부인이 주선해주오.”

“상감마마 어찌 그런 불길하온 분부를 내리시옵니까?”

상감은 눈물을 글썽이는 부인의 손을 잡는다. 상감의 손은 싸늘하였다.

문명부인의 따님인 요석은 상감이 자리에 누운 날부터 잔을 안자고 시중을 들고 있었다.

문명부인은 상감의 침실에서 물러나오는 길에 상감에게 가까이 시중을 들고 있는 요석을 불러 물었다.

“분황사 원효스님께서 문병 오셨더냐?”

“아직 아니 오셨습니다.”

“어인 일이신고?”

“아마 아무 기별도 보내지 않았다 합니다.”

“기별은 누가 보내고 말고 하느냐? 네가 나인을 시키지 않고?”

“소녀가…?”

요석은 말문이 막혔다.

마음속으로야 하루에도 열 번은 더 보내고 싶었지만 병상 곁에 꼬박 붙어있는 지장법사가 두려워서 감히 엄두도 못 내고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가?

딸이 놀라며 반문함을 본 문명은 얼른 짐작이 갔다.

문명부인은 나인을 불러 지장법사가 듣건 말건 분부를 내린다.

“내일 일찍 분황사 원효스님에게 가서 상감마마께오서 위중하시니 부처님께 쾌유를 빌어 주십사고 여쭈어라.”

이렇게 하여서 오늘 아침에사 궁안의 소식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원효는 곧 사시(四時)부터 기도를 드리도록 분부하여 만선을 보낸 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창문을 통해 하늘을 응시한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떼가 느슨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나고 죽는 건 한 점의 구름이 일었다 꺼지는 것….’

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구름의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솜덩이처럼 복스러운 일단의 구름은 부처님의 얼굴로 보였다가 승만여왕의 근엄하고 고운 얼굴로도 보였다.

그는 이내 눈을 돌려 책상위에 모신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우러른다.

문수보살은 그의 원불(願佛)이다.

문수는 일체지(一切智)의 상징이다. 중생이 부처가 되자면 곧 이 일체지를 증득하여야 한다.

부처가 부처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일체지를 지닌 때문인 것이다.

중생이 부처가 되려는 것은 부처의 거룩한 지위가 부러워서가 아니다. 바로 생사(生死)의 굴레를 벋어 버리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중생이 생사의 굴레를 떠메고 있음으로 해서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이다.

온갖 권세와 영화를 보장받는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는 상감도 생사의 굴레를 벋어버리지 못함으로 해서 영육(靈肉)의 갈림길에서 온갖 번민과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문수보살에게 눈을 모으면서 내심으로 이렇게 기원했다.

‘제 업보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생계의 당연한 섭리입니다만 상감마마께서는 아직 젊으십니다.

더 일하실 수 있고 더 닦으실 수 있는 춘추시오니 더 살으심이 당연한 이치가 아니오리까?

문수보살님, 가호 내리시옵소서. 보살님의 혜안(慧眼)으로 상감마마의 무명업보(無明業報)를 꿰뚫으사 봄눈 녹이듯 녹여 주옵소서….’

원효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시마지를 올리는 종소리가 대웅전에서 찌렁찌렁하게 울려왔다.

그는 종소리를 듣고는 현실로 돌아와서 기도입재에 참여하려고 장삼과 가사를 수하였다.

그는 자신이 상감마마의 환후에 대해 남보다 더 마음을 쏟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어떤일에 부딪혀서 그 일을 자기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인 줄로 알면 그에 깊숙이 빠지게 되고 시간도 잠깐사이에 흘러가게 마련인 것이 인간살이의 한 모습인가 보다.

원효는 제대로 붓을 들어 미타경소를 써보지도 못한 채 사흘이 훌쩍 넘어갔고 다시 하루를 서성이다가 상감의 승하한 전갈을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상감의 생시에 문병을 가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저해지는 냉철함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어서 그는 어떤 결정도 뚜렷이 짓지 못한 채 마음만 울적한 상태로 나흘을 보내고는 상감의 승하한 소식에 접한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결단력이 강하다고 자부해 온 그로서, 왜 무엇이 걸리기에 문병을 못 갔던가?

생각하면 후회로운 노릇이다. 그토록 존경해주고 아껴주던 상감이 아니더냐?

그러한 상감에게 고이 눈을 감고 가시도록 왜 병문안도 못 갔느냐 말이다.

상감이 자기를 좀 사모한들 어떠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감 자신이 사모하는 것이지 자기로서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무관하다면 어찌 문병을 못 갔을까? 상감에게 자신이 무심하였다면 일 년 내내 한방에서 살을 맞대고 뒹굴어도 무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원효는 상감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 분황사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고 또 사십구일재를 지내는 동안에도 그냥 그대로 눌러 있었다.

사십구일재는 장안의 각 절에서 봉행하였지만 새 왕이 된 춘추공의 부부는 선왕의 유언을 따라 분황사에서 원효의 설법으로 더불어 성대히 재를 올렸다.

원효는 선왕의 유언대로 아미타경소를 모두 지어 마쳐서 사십구재 때 새 상감을 위시하여 문무백관과 장안에서 가장 지체 높고 이름 있는 선남선녀가 경청하는 가운데 우렁차고 근엄한 목소리로 설하였다.

그는 아미타경 한 권을 다 설하고 맨 마지막에 이렇게 부연하였다.

“오늘의 주인공이신 승만 대왕 선가여, 산승이 설하는 아미타경을 듣고 심지(心地)가 활짝 열렸는가?

심지가 열렸다면 극락정토는 필시 선가에게서 멀지 않을 것이요, 만일 이 법문을 듣고도 심지가 깜깜한 채라면 극락정토는 선가에게서 십만억 국토를 지내야만 존재하리라.

십만억국토를 무슨 재주로 건너갈고? 육신을 날려 태허공을 나른다 한들 십만억국토를 건너갈까?

부처님의 삼승교법(三乘敎法)을 줄줄 외운다 한들 십만억국토를 넘어설 수 있을까?

백 가지 맛있는 음식으로 부처님께 공양하고 천번 만번 염불을 외운다한들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을까?

가사 선가가 항하사(恒河沙) 모래수와 같은 칠보(七寶)로 탑을 쌓아 시방세계 구석구석에 세운다 한들 십만억국토의 저쪽에 있는 극락정토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니오. 모두가 아니오, 유위복(有爲福)으로는 극락에 왕생할 수 없는 것이오.

중생의 누(漏)가 다하지 않고는 극락에 왕생할 수 없는 것이오. 우리의 가슴에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이 스러지지 않고는 극락에 왕생 할 수 없는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만 삼독심이 스러지고 온갖 누(漏)가 다하게 될까?

그것은 오로지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여야 하는 것이오.

일체지는 어떻게 하여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나’노라 하는 나[我]를 조복하여야 하오.

‘나’노라 하는 ‘나’라는 놈이 으시댐으로 해서 탐진치도 일어나고 갖가지 업도 짓게 되는 것이오.

그 ‘나’라는 놈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오.

마음만 조복하면 ‘나’라는 놈도 꿈틀거리지 않고 나라는 놈이 설치지 않으면 탐진치는 그 자취마저도 없는 것이오.

탐진치가 일지 않으면 삼악도(三惡道)가 있을 수 없고 삼악도가 없으면 따로이 극락정토에 왕생할 필요도 없는 것이오.

그러한 즉 지옥 천당도 마음 안에 있고 극락정토도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니 마음을 조복하면 이 자리가 곧 극락이요, 마음을 조복하지 못하면 극락이 곧 사바세계인 것이오.

마음을 미혹한즉 사바세계와 극락정토가 둘이나, 마음을 깨친즉 사바가 곧 극락이며 극락이 곧 사바인 것이오.

부처라 하는 이는 누구인가? 마음을 조복한 대장부가 그이요.

중생이란 누구인가? 마음을 미혹한 졸장부인 우리를 가리킴이오.

그러므로 부처란 마음을 조복하고 깨쳐서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고 보살만행(菩薩萬行)을 성취하여 항사공덕(恒沙功德)이며 무량신통(無量神通)을 갖추신 출격장부(出格丈夫)인 것이오.

오늘의 선가여! 제백사(除百事) 폐일언(蔽一言)하고 어서 마음의 눈을 뜨시오.

마음의 눈을 떠서 법계(法界)의 실상(實相)을 똑바로 보고 사바세계의 참모습을 꿰뚫어 보시오.

필시 중생계의 낙은 참낙이 아니며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니, 실오라기만한 애착도 갖지 말고 훨훨 털고 일어나서 무루복(無漏福)과 무루지(無漏智)로 장엄한 열반피안(涅槃彼岸)에 건너가사이다.

승만대왕선가(勝鬘大王仙駕)여! 그러면 어느 곳이 열반피안(涅槃彼岸)인고?

“춘당(春塘)에 실바람 이니

연꽃향기 그윽하고

서형 산에 해 기우니

온 장안에 쇠북소리로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