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후기] 조사까지 챙기는 번역가는 처음이야
상태바
[편집 후기] 조사까지 챙기는 번역가는 처음이야
  • 이기선
  • 승인 2020.10.30 16: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10월에는 책을 많이 냈습니다. 자그마치 네 권이나. 원더박스 월간 최대 출간 종수예요.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 그런 건 아니고(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누가 책을...ㅠ.ㅠ), 어쩌다 보니(9월에 책을 못 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1얼)가 마지막 네 번째 책을 맡았는데요. 출판계에 입문한 지 십수년 만에 아주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험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제가 편집한 책을 간략히 소개합니다.(책이 자신의 간단 이력서를 쓴다면 이런 느낌 아닐까요.)

* 제목: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 부제: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
* 저자: 궈징
* 역자: 우디
* 해제: 정희진
* 출간일: 2020. 11. 4.(판권에 적힌 날짜)
* 내용: 코로나19 때문에 봉쇄된 우한에 살면서 2020년 1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39일 동안 쓴 일기. 1인 가구주, 서른 살, 여성,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우한에서 겨우 한 달 남짓 지낸 이방인 신분인 저자가, 사회적 자원이 전무한 극도로 고립된 상황에서 살아낸 이야기. 고립감을 이겨내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매일 밤 친구들과 화상 채팅을 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고, 틈틈이 산책을 나가서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연결지점을 만들고, 봉쇄된 도시에서 관찰한 비상식적인 일과 일상의 소소한 풍경이 담겨 있다.


다시 제 경험 이야기로 돌아오면, 편집인은 다양한 유형의 저술가, 번역가를 만납니다. 자신의 글을 대하는 태도로만 분류하자면,

1. 글은 최고인데 편집을 출판사에 그냥 맡기는 분
2. 글은 최고인데 편집을 꼼꼼하게 챙기는 분
3. 글은 보통인데 편집을 출판사에 그냥 맡기는 분
4. 글은 보통인데 편집을 꼼꼼하게 챙기는 분
5. 글은 별로인데 편집을 출판사에 그냥 맡기는 분
6. 글은 별로인데 편집을 꼼꼼하게 챙기는 분

이렇게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싶습니다. 편집 과정을 기준으로 보면 1~3번을 만날 때는 즐겁고, 4~5번은 쏘쏘, 6번은 지옥입니다.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릴 자리가 있을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6번만 아니라면 꼼꼼한 분을 만나는 쪽을 선호합니다. 그런 분과 함께하면, 비록 일에 품이 더 많이 들고 스트레스를 좀 더 받더라도 결과물이 좋아지거든요. 당연히 독자분들도 더 좋은 독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고요. 판매는... 꼭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꼼꼼한 저자로 강한 인상을 남긴 어느 대학 교수분이 떠오릅니다. 조르주 바타이유라는 사상가를 소개하는 글을 정말이지 유려하게 써 주셨죠. 맞춤법 빼놓고는 제가 글에 손을 댈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분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건 '조사'까지 꼼꼼히 챙기셨기 때문입니다. -은, -는, -이, -가, -까지, -마저, -조차, -부터...로 이어지는 조사 목록에서 어느 게 가장 적합한지를 두고 저랑 한참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어요. 문학 편집인들이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는 얘기는 들은 터라 '드디어 내게도!'라는 심정이었죠.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글을 잘 쓰는 분이 본인 글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며, 3년 차 어린 편집인이었던 저는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면 저술가분들은, 정도 차는 있을지언정 자기 글에 강한 애정을 품고 편집인과 함께하려는 태도를, 대개는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번역가분들은 조금 달라요.

번역은 보통 매절(200자 원고지 1매당 얼마 하는 식)로 작업이 진행되는지라, 시간이 정말 소중한 자원입니다. 또 번역은 원저자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이기 때문에 번역가가 번역문에 갖게 되는 책임과 권한이 저술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편집 과정에서 번역가보다 편집인이 더 큰 결정권을 갖는 경향도 있지요.

이 세 가지를 제 나름대로 조합하면 이런 결론이 나와요. 일의 구조상 책임이 상대적으로 작은 데다 권한까지 작으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는 자세를 갖고 있는 번역가분들이 적지 않다. 번역가분들을 폄하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번역이라는 일이 처한 조건과 현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지금까지 번역서를 작업할 때 모두 제 주도로 진행한다는 느낌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함께 작업을 한 우디 번역가는, 번역이 본인의 저술이라는 태도로, 정말이지 조사 하나까지 꼼꼼하게 책임을 졌거든요.

처음 번역문을 받고 제가 놀란 건, 첫째, 저자에게 보내는 질문이 100개가 넘었고, 둘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가가 단 주석이 70개가 넘었으며, 셋째, 편집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 메모가 거의 모든 페이지에 달려 있고, 넷째, 문장 중간에 다른 책이 나오면 번역서뿐 아니라 원서까지 모두 살피면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거 만만치 않겠는걸!'

아니나 다를까, 우디 번역가는 말 그대로 저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문장을 만들어 갔습니다. 번역서 편집 과정에서 번역가는 두 번쯤 문장을 살피는 게 보통인데, 우디 번역가는 저랑 똑같이 4회 통독에 마지막 확인까지 함께했습니다. 디자이너에게 본문 수정을 의뢰하기 전에도 어디를 어떻게 수정할지 하나하나 모두 함께 체크했죠.

힘들었습니다. 문장을 손볼 때마다 여기는 이래서 이렇게 고쳤고... 등등 이유까지 세세하게 달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하나하나 확인과 협의 절차를 밟아야 했으니까요. 보낸 메일이 몇 통이며 통화한 시간이 얼마인지. 시간도 정신력도 체력도 모두 보통의 번역서보다 곱절 가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보고 이번 편집 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짜증으로, 나중에는 기쁨으로'가 될 것입니다. 작업 방식이 너무 낯선 나머지, 처음에는 사실 조금 짜증도 났어요. 저희도 시간에 쫓기는 신세이기는 번역가와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속으로 '이분은 왜 이렇게 깐깐하게 구시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원고를 주고받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제가 잘못 이해한 구절이나 번역이 모호했던 부분이 정확하고 명확하게 바뀌는 글, 저의 이해를 위해 번역가가 단 1,500자가 넘는 상세한 메모, 서로 솔직히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겨난 신뢰감 등을 경험하면서, 제가 오랫동안 잘못 생각해온 것들이 교정되었고 '이분이라면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에 중국어 번역을 의뢰할 일이 생기면 우디 번역가에게 먼저 물을 생각입니다.(실은 이분이 번역한 «나를 그릇으로 삼아»라는 책을 3얼이 지금 편집하고 있어요. ^^) 좋은 파트너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든든한 일입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