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안다는 것 불교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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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안다는 것 불교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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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2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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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하는 기쁨

 

불교를 안다는 것 불교를 한다는 것
저작·역자 중현 지음 정가 18,000원
출간일 2021-04-26 분야 불교_에세이
책정보 판형 140*215 | 두께 270mm

352쪽 | 2도 |ISBN 978-89-7479-818-2(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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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당신은 불교를 알고 있습니까? 불교를 하고 있습니까?

안다는 것은 하는 것이고 달라지는 것!

생활 속에서 재해석한 편안한 불교 교리서이자

행行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앎에 대한 이야기!

‘불교는 사찰에 오지 않아도 각자의 삶에서 실천하며 사는 데 있다.’ 무등산 증심사 주지 중현 스님이 코로나19로 절에 오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지상 법문집이다. 코로나19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종교의 자리는 점점 줄고 있다. 저자는 지금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지 묻고, 그동안 우리는 지식 중심의 불교를 해온 것은 아닌지 성찰한다. 그리하여 미래의 불교는 개인에게 삶의 기준을 제시하는 ‘인생 규범’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로 이해해온 불교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재해석하여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1장 ‘불교를 안다는 것’은 공空, 무아無我, 오온五蘊, 윤회 등 익숙하게 들어온 19가지 개념을 쉽게 풀고 일상에서 녹아들도록 이끈다. 2장 ‘불교를 한다는 것’에서는 저자의 체험과 사유로써 펼쳐지는 불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앎과 삶을 잇는 지혜를 스스로 깨치도록 돕는다.

‘안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불교가 위대한 종교인 이유는 아는 데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깨치는 데 있다.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깨쳐야만 그것이 불교이다.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위로

저자_ 중현 스님

20대 내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전념하였고, 30대에 프로그래머로 변신하여 고려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참여했다. 1998년 송광사에서 범일 보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봉암사, 송광사, 화엄사, 석종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화순 용암사 주지와 〈월간 송광사〉 편집장을 지냈으며, 〈광주일보〉 등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등산 증심사 주지로 살며 유튜브 채널(증심사)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저서로 《길고양이의 법문》 이 있다.

“어쩌다 스님이 되었다. 태어나 자란 곳은 부산이지만 서울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30대 중반에 순천 송광사로 출가했다. 고향 부산보다 서울 지리가 더 익숙하고 지금은 광주에 산다. 말투에 부산 억양이 남아 있을 뿐 정체성을 찾기 힘들다. 24년째 중노릇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가끔 스님 같지 않고 옆집 아저씨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어서 항상 사람 사는 세상 언저리 어디쯤 자신을 놓아두고 싶지만, 슬금슬금 중심으로 쏠리곤 한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 자신이 요긴하게 쓰일 곳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잘 쓰이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다 스님이 되었고, 스님으로 20년 이상을 살고 나서야 스님으로 사는 게 팔자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으로 이번 생을 마감할 수만 있다면 더는 이생에서 바랄 게 없다.”

목차 위로

들어가며

1 불교를 안다는 것

불교 :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

예불과 성불 : 마음이 감동으로 꽉 차오를 때가 부처

불교의 전파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깨달음 :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 즉시 깨달았다

오온 : 반야심경의 핵심은 육바라밀에 있다

무상과 자비 : 내가 사라지면 세계도 사라진다

염불과 화두 : 무념무상, 부처의 경지로 이끌다

법신 · 보신 · 화신 :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탐 · 진 · 치 : 선과 악에 대한 명쾌한 풀이

윤회와 무아 :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아공 · 법공 · 구공 :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눈

자비 : 생각과 행동으로 발현되는 것

명상 : 계율과 선정, 지혜의 길이 하나로 모이다

삼매 : 세상과 나를 바르게 연결하는 침묵

호흡 수행 : 마음의 환승역

번뇌 :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보라

보시와 지계 : 세 가지 행복을 지키는 길

수행 : 수행자와 수행에 대한 바른 생각

마음공부 : 아는 것도 다시 하고, 할 때마다 처음처럼

2 불교를 한다는 것

하나를 죽여야 한다면 무엇을 죽여야 합니까

절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나’는 없지만 ‘행위’는 있다

자동차 운전과 수행은 같다

복은 비는 것인가, 짓는 것인가

요리가 맛이 없다고 재료를 탓하랴

나의 욕망 사용설명서

의지가 있다면, 부적은 희망이 된다

나의 직업이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라면

안다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다

자각하는 순간 욕망은 관리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의미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이유

자전거가 멈춘 것은 혼이 빠져나가서일까

죽음은 늘 우리 곁에서 놀고 있다

귀신은 붕어빵 틀 속에 있다

감정 분리, 안과 밖을 구별하는 지혜

나를 내려놓으니 모든 순간과 모든 사람이 하나일세

상세소개 위로

무등산 증심사에 가면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무등산無等山은 불교적으로 풀면 ‘모두가 같다’, 즉 ‘일체가 하나다’라는 뜻이다. 무등산 기슭에 증심사證心寺가 자리해 있다. 증심證心은 ‘마음을 증득하다, 깨닫다, 맑히다’라는 뜻이다. 무등산 증심사에 가면 세상 풍파와 맞설 든든한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증심사도 타격을 입었다. 주지 중현 스님은 그야말로 인적이 끊어져 ‘절깐’이 되어버린 텅 빈 절 마당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절이란 무엇인가? 또 스님이란 무엇인가? 사찰은 사람들이 찾아와 삶의 고단함을 씻고 스님에게서 인생 지혜 하나쯤 받아오는 곳인데, 사람 없는 절이 무엇이고 스님은 무슨 소용일까? ‘불교는 사찰에도 없고 스님에게도 없다!’ 중현 스님이 내린 결론이다. 불교는 바로 각자의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 스님은 절에 사람이 오지 않는 것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며, 승복 입은 자신이 할 일은 멀리 있는 이들이 스스로 마음의 건강을 챙길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지난해 절을 찾은 사람들과 나누었던 법문을 추려 책으로 묶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끝없는 복습이다

법정 스님은 ‘종교 생활은 복습’이라고 했다. 불교에 대한 편견 중 하나는 ‘불교는 복잡하고 심오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고 공부해야 하는 종교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님 재세 당시부터 하나의 수행체계로, 교리는 실천을 위한 바탕이었다. 이는 2,500년이 지난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불교는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지만, 이 책의 저자 중현 스님은 ‘불교는 종교의 외피를 두른 수행 시스템, 즉 수행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은 ‘행복하기 위해서 행行을 닦아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행복을 가로막는 수많은 방해 요소(‘번뇌’로 총칭되는 온갖 생각과 감정)들을 잘 관리하고, 그것이 마침내 유기적인 이타 행위로 발현되도록 이끄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수행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문제가 닥칠 때마다 자신과 대화하며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법정 스님이 말한 ‘복습’은 이러한 끊임없는 대화, 실천, 연습을 가리킨다. 불교는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해야 하는 종교임을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수행의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어야 내가 진짜 힘들 때, 인생에 역경이 닥쳐왔을 때, 내 마음의 번뇌를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수행은 다른 것 없다. 내 마음의 번뇌를 스스로 살피고 ‘아, 내가 지금 힘들어하는구나!’ 알아차리고 번뇌를 녹이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종교가 사라지는 시대,

불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 종교가 필요할까를 생각해 본다. 종교와 과학, 철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오래전 종교는 우주의 근원과 생성,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밝히고 해석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를 통해 세상의 규칙과 규범이 만들어졌다. 해석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차츰 철학이 분리되었고, 철학적 담론에 대한 객관적 검증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과학이 발달하였다. 철학과 과학의 발달로 종교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었다. 바야흐로 4차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시대, 종교의 신비스러운 외피가 벗겨진 오늘날 종교의 의미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종교가 가장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현대인들이 고뇌하고 방황하고 심리적 고통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기준을 스스로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회 구조가 단순하고, 종교와 사회가 제시하는 삶의 틀 즉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었다. 또 도덕과 윤리 규범은 매우 자세했으며 개인은 자연스럽게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삶의 구조가 다양해진 현대에는 그 기준이 모호해졌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기준과 상식은 빈약해졌다. 저자는 이 헐거워진 공간을 불교를 포함한 종교가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일방적인 권유와 지침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맞춰 개인 스스로 생각하고 수용하여 자기만의 바른 규범을 만드는 데 종교가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더 풍요롭게, 영혼의 깊이를 더하고, ‘바깥’을 더 많이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오늘날 종교가 할 일이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녹아 있는 이 책은 지금 바로 내 삶에 폭과 깊이를 더해주는 실용적인 불교 입문서이다.

단 한 번의 깨달음이 아닌

일상에서 매 순간 체험하는 깨달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부처님은 이 세계를 원인과 조건으로 생성하고 소멸하는 연기적 관점으로 이해하며, 인간 삶의 괴로움을 해결했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혹자는 깨달음을 추상적인 어떤 신비한 경지로 오해하고 수행의 목표로 삼는다. 저자는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경계하며, 오늘날의 깨달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찰하며 이를 수행으로 다져 종국에는 내 삶을 바꾸는 데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찰과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말한다. 연기, 무상, 무아, 공 등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일상 법문으로써 이해를 돕고, 나아가 예불, 염불, 참선, 호흡 수행, 화두, 번뇌 끄기, 자비, 팔정도, 계정혜, 마음공부 등 수행법에 대한 의미와 방법, 태도를 세세하게 일러준다. 수행은 벼락치기로 통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기 체험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직접 체험하고 실천하는 불교를 함으로써, 나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불교를 하자고 저자 중현 스님은 각자의 삶에 바쁜 이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

책속으로 위로

우리는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하심시켜야 한다. 낮아지고 낮아져(下心) 땅속으로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다(無心). 하심이 깊어져 무심이 되는 것이다. 무심이란, ‘나 잘났다’는 중생심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저는 이 나이 되도록 이뤄놓은 것도 없고, 변변찮은 삶을 살았는데 무슨 잘났다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냉정히 따져보면 이 말은 거짓말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낮은 삶을 살더라도, 자기 마음속에 하나쯤은 내가 잘난 것이 있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불은 이런 마음까지도 없애는 수행이다. (29쪽)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더듬거리며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밝은 방에 있고 싶다면, 그저 불을 켜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내가 있는 이 어두운 방이 환한 방으로 바뀐다. 어느 순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한순간에 불이 켜지니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47쪽)

‘부처님 말씀대로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잡념이 사라진다, 나라는 것은 없다, 불자라면 오계를 지켜야 한다.’ 이런 건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착각하지 말자. (49쪽)

부처님께서는 자비심을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일으키고 실천하라고 당부하셨다. 자비심이란 내 맘대로 일으키는 게 아니다. 화가 날 때는 자비심을 내팽개치고, 심심하고 시간이 나면 자비심을 내 봉사하고, 손자가 내 앞에서 재롱을 피우면 그 손자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다. 하루 24시간 평생 나와 남에게 나아가 모든 중생에게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118쪽)

계를 지키고 올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부처님 말씀을 꿰차고 있다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다. 하루 종일 통나무처럼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참선을 한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렇듯 계행과 선정과 지혜는 함께 실천해야 한다. 사실 우리 불자들은 일상적으로 명상을 하고 있다. 기도를 하면서 내 마음을 잘 살펴 마음에 잡생각이 사라지고 기도하는 그 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면, 그게 명상이다. (126쪽)

평소에 조용한 선방에서 참선하고 마음공부를 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에서 부대끼는 골치 아픈 일, 화나게 하는 일, 신경이 쓰이는 일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 어떠한 감정, 즉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감정이 요동치지 않는다면 당연히 마음은 고요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 상태가 과연 수행의 목적지일까? 아니다. 아무 감정도 없고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하루 24시간 앉아만 있다면, 그의 공부에 진척이 있을 수 있을까? 방석 위에 죽은 나무를 올려놓은 것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다. 오히려 기뻐하고 슬퍼하고 우울한 감정들이 시끄럽게 들락날락하더라도 그 거친 감정들을 잘 다스려야 공부에 진척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41쪽)

“과거의 법에 대하여‘법은 지나갔다’는 생각도 집착이다. 미래의 법에 대하여 ‘법은 오지 않았다’는 생각도 집착이다. 현재의 법에 대하여 ‘법이 있다’는 생각도 집착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데도 집착하여 ‘이것이 과거다, 현재다, 미래다’라고 착각한다는 말씀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법’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체의 존재를 뜻한다. (216쪽)

어쩌면 인생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한 발 한 발 열심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곳에 가 있을 확률이 높다. 시시포스의 이야기에 대한 카뮈의 해석을 불교에 적용하면 이렇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과 같다. 나는 없지만 행위는 있다. 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하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작자는 없지만 행위는 있다.” 명심하자. 행위를 하는 사람(作者)은 없지만 행위(業)는 존재한다. (219쪽)

아무리 멋진 자동차라도 배터리가 방전되면 자동차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자동차는 수시로 운행해야 배터리가 충전되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릴 수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별거 없네.’ 하며 수행을 그만두는 사람들은 주차장을 나서기도 전에 배터리 방전으로 시동이 꺼져 버린 자동차와 같다. (223쪽)

누가 나에게 기회를 줬을까? 고생하던 시절의 내가 주었다. 그때 고생하지 않았다면 백일기도를 할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고, 혼자 이리저리 동동거리다 힘에 부치기도 했다. ‘말사 주지, 나 안 할란다.’ 이러면서 다 팽개치고도 싶었다. 그런데 강원 시절에 붙은 습관이 엄청난 힘으로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때의 고생이 예불해야 하면 예불하고, 기도해야 하면 기도하고, 절해야 하면 절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227쪽)

무엇이건 직업으로 삼는다고 함은 그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숱하게 많은 사람이 역시 누구인지도 모를 나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듯, 나 역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의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회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촘촘하게 연결되어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다만 각자의 일상에서 그런 연결망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마치 물고기에게 바다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민감하지 못한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나 혼자서 살아간다는 생각은 명백한 착각의 산물이다. (271쪽)

일본의 역사학자인 아베 긴야(阿部謹也)가 이렇게 말했다. “안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는 것보다 발심하는 것이 중요하고, 한 번 발심하고 마는 것보다 미미하더라도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다. 직접 실천해야 한다. ‘내 안에 소유욕이 있구나. 내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면 그 소유욕과 애착을 버려야 한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안 되니까 안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 안의 소유욕과 애착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신 안에 있는 불안함을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라며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긴다 면, 그는 자신이 착각하며 사는 줄 모르는 사람이다. (280쪽)

우리 각자의 마음에는 붕어빵 틀이 있다. 붕어빵과 비슷한 걸 보게 되면 그 틀에 먼저 맞춰보고 이것은 붕어빵이라고 인식한다. 인터넷에서 사진과 설명을 보고 나서 머릿속에 요령이라는 틀이 생기게 되면, 나중에 요령을 또 보았을 때 아무 고민하지 않고 요령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는 이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붕어빵이라 하고 이 소리가 나는 종을 요령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틀이 있다. (335쪽)

내가 덧씌운 감정을 분리해야 한다. 내가 어떤 감정을 이 사람에게 덧칠하고 있는가를 구별하는 때부터 비로소 대화가 시작되고 인생이 지혜로워진다. 내 안의 것은 나의 감정이며, 내 밖의 것은 삼라만상이다. 밖의 것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해서 거기에 내 감정을 덧칠하고는 마치 밖의 것이 나에게 그 감정을 던졌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안과 밖의 것을 혼동하지 않고 구별하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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