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연등축제는 어떤 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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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연등축제는 어떤 날이었을까
  • 유권준
  • 승인 2018.05.0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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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확인해보는 우리가 몰랐던 연등회에 얽힌 옛 이야기들

연등행사는 연꽃 등을 다는 행사가 아니라,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정월 보름 행사에서 비롯

역사속의 부처님 오신날은 어떤 날이었을까? 역사속의 연등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동국세시기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이 기록하는 부처님 오신날의 풍경은 연등행사(燃燈行事)와 관등(觀燈)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민속행사의 모습이다.

여기서의 연등(燃燈)은 오늘날 연꽃모양의 등을 달고 행진하는 연등축제와는 조금 다르다. 등의 모습도 연꽃 모양이 아니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연등행사는 말 그대로 등을 달아 세상을 밝히는 행사였다. 시기도 부처님 오신날인 사월초파일이 아니라, 정월 보름이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며 전통적이고 민속적인 연등행사가 불교와 습합되기 시작했다. 불교행사로서 연등회는 진흥왕 12년 (551년) 팔관회(八關會)가 열리면서 국가적 행사로 확대됐다. 신라 때는 등을 보는 행사라 하여 간등(看燈) 혹은 관등(觀燈)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기록이다. 경문왕 6년(866년)과 진성여왕 4년(890년) 정월 보름에 황룡사로 행차하여 연등을 보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시기도 부처님 오신날 즈음인 사월 초파일이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관등행사가 매년 정월 보름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로 넘어와도 시기는 바뀌지 않는다. 주로 정월 보름과 2월 보름 국왕이 화려한 연등을 밝히고 잔치를 열었다고 기록한다. 다만 행사가 더욱 커지고 화려해졌다. 충렬왕 34년(1308년)에는 연등회를 주관하는 관청인 연등도감이 설치될 정도였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정월과 2월에 연등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횟수도 많아져서 정월에 10회에서 20회의 연등회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기적인 연등회외에도 특설연등회도 수시로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문종 21년(1067년)에는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었을 때 축제와 함께 연등회가 5일 밤낮 동안 성대히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1073년에는 봉은사에서 불상을 새로 조성한 것을 기념해 성대한 연등회가 열렸다는 기록도 있다. 규모도 날로 커져 궁궐 근처에 수만개의 연등이 걸렸다는 기록도 있고, 연등에 주옥(珠玉)으로 장식해 화려했다는 기록도 있다.

4월 초파일  연등회 개최는 고려 의종때 부터

4월 초파일에 연등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 의종때에 이르러서다. (고려사 열전 권제35)

고려 의종때 환관이었던 백선연이 왕의 나이에 맞추어 동불(銅佛) 40구를 주조하고 관음도(觀音圖) 40점을 그린 다음, 4월 초파일에 별원(別院)에서 점등하고 복이 내리기를 기원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연등회는 축소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초파일 연등 행사가 열렸지만, 태조 15년(1414년) 궁궐내에서의 초파일 연등행사를 중지시킨 이후 왕이 주재하는 연등회는 사라진다. 대신 수륙재 행사가 열려 2월 10월 1년에 두차례씩 연등회를 대신하게 됐다.

연등회를 살펴볼때 또 한가지 살펴볼 것은 연등회의 성격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연등회는 4월 초파일을 기념해 열리는  행사가 아니었다. 한자를 보아도 동지가 지나 정월 보름이 되면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해 등을 다는 행사(燃燈行事)라는 의미로 열리는 행사였다. 그러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적 의미가 함께 하면서 행사가 더욱 커지고 화려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등회의 시작이 새해를 기념해 등을 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등의 모습도 현재와는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남아있는 연등회에 달린 등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동국세시기에 묘사된 등의 모습은 수박등, 거북등, 오리등, 일월등, 학등, 배등, 연화등, 잉어등, 항아리등, 누각등, 가마등, 마늘등, 화분등, 방울등, 만세등, 태평등, 병등, 수복등 이었다고 전한다. 연꽃 모양의 등이 있기는 했지만 일부였고 나머지는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의 동물이나 부와 다산을 상징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연등회는 불교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놀이와 축제 성격 강했다

연등회가 지금과 달랐던 것은 또 있다. 연등회는 불교가 전래되기전부터 열리던 행사였기 때문에 놀이와 축제의 성격이 훨씬 강했다.

기록에는 긴 장대에 달린 등을 보면서 즐기는 관등 외에도 형형색색의 등과 불빛 그림자를 이용한 만석중놀이가 있었다.  영등(影燈)놀이라고도 했는데, 영등 안에 틀을 만들어 놓고 종이에 개와 매를 데리고 말을 탄 사람이 호랑이, 이리, 사슴, 노루 등을 사냥하는 모습을 그려서 틀에 붙여 바람으로 빙빙 돌아가게 하여 거기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며 즐기는 놀이였다.

수부(水缶)라는 놀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부희(水缶戱), 수고(水鼓), 격부(擊缶), 수포악(水匏樂) 등으로 부른 이놀이는 물이 담겨 있는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빗자루로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노는 놀이였다.

또 스님들이 만든 성불도 놀이도 있었다. 윷놀이처럼  도판과 주사위와 말을 사용하여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벗어나 성불에 도달하는 과정을 놀이로 만든 것이다. 여섯 면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자를 한 글자씩 쓴 주사위 세 개를 던져서 글자의 조합에 따라 도판에 적힌 육도의 무수한 길을 따라가며, 윤회에서 벗어나 먼저 대각(大覺)에 이르는 자가 이기는 놀이다.

성불도 놀이는 성불에 이른 이에게는 부처님처럼 콧수염과 백호를 그리고 축하해주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법문을 할 수 있어 제자가 먼저 성불하면 스승이든 노승이든 그에게 예를 하고 법문을 듣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이 놀이는 참여한 모든 이들이 성불해야 끝내도록 하여, 먼저 대각에 도달한 이도 마지막까지 함께 어울려서 제도를 해야 하는 교훈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놀이다. 특히 즐겁게 놀이하되 규칙이 엄정하고, 불성의 평등함과 대중화합의 의미를 담고 있어 여가를 수행의 연장으로 활용해온 불교 전통을 살필 수 있는 놀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다른 의미는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날의 역사적 의미중 우리가 꼭 살펴야 할 것 중 하나는 과거 부처님 오신날이 어린이날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등회가 정월 보름 즉 새해를 밝히는 것에서 시작한 민속놀이적 성격이 있다면 연등회의 시기가 4월 초파일로 옮겨지면서부터는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와 어린이들을 사찰에 친근하게 다가오게해 불교적 세계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즉 앞서 이야기한 수부(물장구놀이)나, 성불도 놀이, 만석중 놀이 등 놀이를 통해 어린이들이 친근하게 불교문화에 접근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또  연등회가 열리는 날이면 등 아래 느티나무 잎으로 만든 떡과 소금에 볶은 콩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초파일을 즈음해 절앞에는 장이 섰는데 이곳에서는 대부분 어린이용품을 팔았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절에가서 예불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장난감을 얻어돌아가는 것이 풍습이었다고 한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린이날이 따로 없었을 때 부처님 오신날이 곧 어린이날을 대신했던 것이다.

 

* 참고문헌
한국고전종합DB,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동국세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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