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불교 공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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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불교 공부 노트
  • 지지엔즈 지음 / 김진무/류화송 옮김
  • 승인 2022.04.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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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가 만난 불교, 그리고 그가 권하는 불교의 지혜

 

철학자의 불교 공부 노트
저작·역자

지지엔즈 지음

김진무/류화송 옮김

정가 18,000원
출간일 0000-00-00 분야 불교
책정보

| 신국판 변형 (148*210) | 320쪽 | 무선 | ISBN 978-89-7479-117-9 (03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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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의심 없이 믿는 거, 난 반댈세!
사고(思考) 없이는 불교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철학자

이 책의 저자 지지엔즈(冀劍制)는 철학과 교수다.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서양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만으로 다시 넘어와 화판대학 철학과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화판(華梵)대학교는 유교와 불교에서 공히 중시하는 ‘깨달음의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였다.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만난 저자는 예의 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에 대해 파고들어 가기 시작한다. 그는 철학자답게 ‘사고(思考)’와 ‘의심’을 불교 공부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우선 윤회나 정토 같은 ‘신앙’에 속한 문제들은 한켠에 놓아두었다. 비록 양자역학이나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에 대한 반론 등을 언급하며 “최근의 과학 연구 성과들이 우리가 믿기 힘들어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나 아직 엄밀한 과학적 견지에서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불교의 목적인 ‘이고득락(離苦得樂)’과 깨달음의 ‘실천’에 주목했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진리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삼독(三毒, 탐욕·분노·어리석음)을 제거해 나가는 수행, 그리고 마침내 무아(無我)를 체득해 궁극의 경지에 올라가는 길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 가장 ‘합목적적’인 이유라고 본 것이다.
이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 역시 철학자다웠다.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의심과 파괴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접근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은 불교신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탐구와 추리를 통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바로 “삶의 고민을 털어내고 싶다면 인생에서 꼭 한 번은 불교를 만나라.”는 것이다.

저자소개 위로

▦ 지은이

지지엔즈(冀劍制)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버팔로캠퍼스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대만 화판(華梵)대학교 철학과 교수 겸 불교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불교학과 철학의 대화, 기쁨의 철학, 비판적사고, 지식론, 마음 철학, 과학 철학 등을 강의한다. 저서로 《해적왕의 철학 수업》, 《틀리지도 맞지도 않은 40가지 생각》, 《논리 오류 감식반》, 《우리 아이의 논리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스토리텔링》, 《마음의 폭풍: 현대 서방의 의식철학 및 개념 혁명》 등이 있다.

▦ 옮긴이

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산법문과 그 선사상 연구」로 석사 학위를,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佛學與玄學關係硏究」(中文)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중국불교사상사』, 『중국불교의 거사들』 등이 있으며, 공저로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 『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불교의 마음챙김과 사상의학』 등이 있고, 번역서로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지장』 Ⅰ·Ⅱ, 『혜능 육조단경』, 『불교명상』, 『도해 금강경』(공역) 『도해 운명을 바꾸는 법』(공역) 등이 있다.

류화송

충남대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가차문자연구」로 석사 학위를, 중국 남경대학 중문과에서 「朱熹詩集傳注釋詩通假字硏究」(中文)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 1~8(공역), 『불교와 유학』(공역), 『도해 금강경』(공역) 『도해 운명을 바꾸는 법』(공역) 등이 있다.

목차 위로

상편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사색(思索)

01 누가 불교를 배워야 할까?

02 인생은 본래 고통이라는 비관주의

03 인생은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많다는 것은 사실인가?

04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의의

05 영혼과 윤회를 믿을 수 있을까?

06 ‘이고득락’은 탐욕[貪]·분노[瞋]·어리석음[癡]을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07 탐욕·분노·어리석음이 어째서 고통의 근원인가?

08 탐욕을 살피고 탐욕을 풀어라

09 분노를 보고 분노를 풀어라

10 어리석음을 보고 어리석음을 없애라

11 무아(無我)란 무엇인가?

12 일체개공(一切皆空)이란 무엇인가?

13 무엇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가?

14 무엇을 ‘오도(悟道)’라고 하는가?

15 깨달음의 기준

하편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수행(修行)

01 수행과 신비한 체험

02 ‘허무감’과 ‘의미감’을 수행의 지표(指標)로 삼다

03 자비심 수행

04 발심(發心)과 도덕실천

05 무상(無常)의 세계관 수행

06 좌선 수행

07 철학의 실천 VS. 불교의 수행

08 업력(業力)의 수행

09 일념심(一念心) 수행

10 정념(正念) 수행

11 지혜의 수행

12 염불(念佛) 수행

13 외왕(外王) 수행

상세소개 위로

저자가 말하는 불교의 닮은 점, 다른 점

흔히 사람들은 불교가 철학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저자는 같지는 않지만 닮은 점은 있다고 말한다.

둘 사이에 공통점 중에는 다른 학문 분야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양자 모두 지식에 대해서는 건설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철학과 불교 공히 기존 지식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철학이든 불교든 모두 사람들이 여러 가지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들을 온힘을 다해 찾아내서 없애야 한다고 여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잘못된 지식에 빠져 있는 상태를 ‘무명(無明)’이라고 정의하고 그걸 없애는 방법으로 ‘정견(正見)’을 제시한다.

잘못을 찾아내는 방법 역시 비슷하다. 깊고 근본적인 사유를 통해 불안정과 불확실을 찾아가고 심지어는 아예 텅 빈 것임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기존 관념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게 이른다.

하지만 그 길에서 양자는 또 다른 것이 되어간다. 철학은 보통 사고를 통해서만 잘못을 없애고, 아울러 가능한 한 다시 사고를 통해서 더 합리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영원히 종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고, 끊임없이 더 합리적인 해답을 찾기만 할 수도 있다. 불교는 사고를 통해서 잘못을 없애는 것 이외에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통해서 최종적인 해답을 직관(直觀)하여 얻는다. 양자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철학은 논리를 의심해서는 안 되고,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철학적 사고는 논리 법칙을 기초로 한다. 예컨대 철학에서는 “모순된 서술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적어도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는 논리에 국한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늘 모순된 서술이 나타난다. 예컨대, 불교는 “모든 고통은 어리석음[無明]에서 나온다.”라고 주장하고, 바로 이어서 또 “무명이 없다.[無無明]”라고 말한다. 이처럼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언어의 모순 속에서 지혜를 여는 계기를 찾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혜를 향상시키면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된 이러한 모순을 발견하게 되고, 아울러 이러한 관점을 타파할 수 있다. 그리고 관점을 타파한 뒤에도 논리가 옳은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직관하는 가운데 논리 밖의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잡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성(空性)’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모든 것이 다 비었으니 논리도 텅 빈 것이고,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 강의

이 책은 교리를 다룬 상편과 수행을 다룬 하편으로 나눠진다.

교리를 다룬 상편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번뇌(탐·진·치)와 삼법인(무상·고·무아) 등에 대해서 다루고, 수행을 다룬 하편에서는 좌선, 정념, 염불 등 수행에 대해서 다룬다.

딱 보면 여느 불교 입문서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철학을 연구하면서 체득한 논리적 사고와 정의 내리는 방법을 활용해 불교를 설명한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좀 더 진지하게 탐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자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철학 이론을 소개한다. 칼 포퍼의 반증주의,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하이데거의 현상학, 유가의 중용지도, 장자의 대자재(大自在), 송나라의 명리학 같은 동서양의 철학 사상 등은 불교를 이해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불교의 이론 중 ‘미신’으로만 취급되는 부분을 반박하기 위해서 칼 포퍼의 ‘반증주의적’ 지혜에 대해 살펴보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에 대해 살펴보면서 데이비드 흄이 문제를 제기했던 자아에 대한 의심에 대해 살펴보기도 한다. 또 불교에서 흔히 쓰이는 말인 발심(發心)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칸트가 제기했던 ‘도덕실천’을 살펴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려운 철학과 어려운 불교가 만나 난해할 것만 같은 이 책은 가장 쉬운 불교 입문서가 되었다. 저자 자신이 처음 불교를 접했을 때 느꼈던 너무 쉽거나 난해하거나, 즉 너무 뻔한 이야기이거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대한 불만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말과 이해하기 쉬운 비유,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책속으로 위로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보라색을 본 적이 없는데, 다만 특별히 수행을 한 소수의 사람만 보라색을 볼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보라색을 본 사람은 이치의 측면에서 “보라색은 파란색과 빨간색의 사이에 있다.”라고 하거나 “보라색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혼합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보라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에둘러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보라색의 신비로움을 진짜로 들여다볼 수 없다. 만약 수행한 사람이 “보라색은 매우 신비롭게 느껴진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이론을 도출해서 차분한 파란색과 열정적인 빨간색이 어떻게 신비로운 보라색을 만들어내는지 토론할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차분함과 열정은 충돌하는 감정이며, 충돌하는 감정이 한데 섞일 때 신비감을 조성하기 쉽다고 주장하는 매우 일리 있는 논문을 쓸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차갑다가도 열정적으로 보이면, 그 사람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학술연구는 매우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보라색을 볼 수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서양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의식은 반드시 피의식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 성질을 특별히 ‘의향성’이라고 명명하는데, 의식은 항상 어떤 방향이 있고 어떤 내용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내용이 없으면 의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관점은 수행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관찰에 해당한다. 수행을 거치고 나면 보통을 초월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며, 그 불꽃이 꺼진 순수의식이야말로 수행하여 무아를 몸소 증득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보라색을 보고 나야 진짜로 보라색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체험을 해야 정말로 무아를 깨닫는다.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참다운 도를 깨달을 수 없다

134쪽~135쪽 <무아(無我)란 무엇인가?> 중

불교를 배우는 것은 사실 새로운 관점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을 배우는 것과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은 이전에 알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새로운 관점을 배울 때는 반드시 기존의 관점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 이런 학습 과정은 일종의 지식 전체에 대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에서 낡은 배를 완전히 뜯어내고 새 배를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기존의 낡은 관점을 아예 제거해야 하는 이러한 일 자체가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이 어려움 또한 집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철학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가 정말로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고, 본래의 지식 기반이 이미 제거되어 아무런 지식 기반이 없는데 어떻게 새로운 지식이 기존의 낡은 지식보다 더 진상(眞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이점에 대하여 불교는 대체로 진짜로 새로운 관점을 파악한다면, 저절로 이것을 진실로 생각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 진상을 발견하는 이러한 인식 과정을 ‘지혜의 직관(直觀)을 통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마치 탐정이 안개처럼 뒤섞인 실마리 속에서 갑자기 하나로 꿰뚫는 일관된 생각을 보았을 때, 영감이 번쩍이고 안개가 걷히며 세상의 모든 것을 간파하여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한없이 기뻐하는 것과 같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불교를 읽고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상태를 ‘도를 깨우쳤다[悟道]’라고 한다. 하지만 도를 깨우쳤다는 것은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고 그 단계 역시 다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사람들이 정말로 이러한 새로운 관점으로 바꿔서 세계를 볼 수 있다면 본래 기존의 낡은 관점과 고통을 가져오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고 깨달음이다. 그런데 단지 이러한 관점을 배운 것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현재 지니고 있는 지식의 기반 위에 새로운 관점을 더하는 것일 뿐이며, 이때의 새로운 관점은 기존의 낡은 관점에 의해 왜곡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진정으로 체득해 깨달아야 한다. 체득해 깨달으면 진정으로 새로운 관점을 깨달아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내려놓게 된다.

115쪽~116쪽 <어리석음을 보고 어리석음을 없애라> 중

전설에 따르면 염라대왕은 한 사람이 평생 했던 모든 일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인 업경대(業鏡臺)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물건이 정말로 존재할까? 사람마다 개인이 살아온 일생의 전 과정을 녹화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없다면 이러한 생각은 매우 비과학적인 것일까?

사실 정말 비과학적이라 해도 이것이 틀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진리의 거리는 한없이 멀고, 얼마나 많은 증거를 찾았든 간에 모두 하나의 진리를 확인할 수 없다고 보는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 같은 대철학자도 있다. 그리고 업경대 같은 물건이 존재한다고 해도 반드시 과학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시간이 불가역(不可逆)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허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인식은 시간의 단일 방향에 제한을 받지만 실제 물리적 세계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시점에 발생한 어떤 일은 우주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이 관점은 단지 우리의 제한된 인지능력으로 인해 생기는 착각일 뿐이다. 만약 이 생각이 맞는 것이라면 누군가 우리의 일생을 녹화할 필요가 없다. 인지능력이 시간의 일방성에 제한받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면, 과거를 돌아보기만 하면 곧 이미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들추어낼 수 있다.

260쪽 「업력의 수행」 중

나의 개인적인 철학 사고와 수행 체험을 가지고 말하면, 이 문제는 이론적으로 간단한 해답이 없다. 이타(利他)의 이면에 있는 진짜 이유가 이기(利己)라면 그것은 진정한 이타가 아니다. 진정한 이타가 아니면 자비심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기적인 요소가 없이 오로지 이타를 말하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는 이 전체적인 사유는 ‘남과 나를 구분하는’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며, 나를 위하는 것은 너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하는 것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며, 두 가지는 완전히 구분된 개체이다.’라는 구조이다. 이 구조 자체가 수렁에 빠지게 하는 관건이며, 우리에게 합리적인 해답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가령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동력이 이기에 있다면, 이타적인 행위의 동력도 당연히 이기에 있지만, 이기를 출발점으로 하는 이타는 진정한 이타가 아니다. 이러한 사유 구조에서는 단순한 이타적인 행위는 불가능하게 된다.

마음에 남과 나를 구분하는 이러한 사유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기와 이타의 절대적인 구분을 없애야 한다. 그것을 없앨 수 있어야 이 사유의 늪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날 길을 찾고 어리석음[無明]에서 깨어나 이 모순을 없앨 수 있다.

211쪽~212쪽 <자비심 수행> 중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에서는 특별한 신비로운 경험이 생기기 쉽다.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과 심지어 어떤 환각까지 생긴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감각들은 대뇌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할 때, 대뇌는 분명히 평소와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러 곳에 있는 나머지 신경전도가 계속 돌아다니는 가운데, 이러한 신경전도들이 평소와 다른 감각 현상을 저절로 만들어낼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많은 수행자들의 조언에 따르면, 이러한 특수한 느낌에 신경 쓰지 않으면 그것들은 보통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게 되고, 신경 쓰지 않아야만 금방 가라앉게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런 느낌이나 환각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이 아무리 재미있고 즐겁더라도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방해자일 뿐이다. 만약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이 즐겁지 않았다면, 더 돌아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연히 신경 쓰지 말고 그것들을 무시한 채 계속 집중해서 의식을 우리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가장 고요한 세계와 내용이 없는 순순한 의식을 목격하고 무아를 직관(直觀)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좌선 수행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다.

246쪽~247쪽 <좌선 수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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