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붓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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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붓다를 만나다
  • 해리슨 J. 펨버턴
  • 승인 2015.11.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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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붓다를 만나다
저작·역자 해리슨 J. 펨버턴,추미란 정가 13,000원
출간일 2015-11-30 분야 기타
책정보 ISBN 978-89-7479-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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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니체,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서양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사상가들을 압축적이고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그들의 이론과 철학적 방법론과 심리를 시간·장소·배경에 상관없이 불교와 최대한 비교해, 어떻게든 동·서양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내려 한다.
저자소개 위로
지은이: 해리슨 J. 펨버턴
50년 넘게 철학을 가르쳤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때부터 그의 주요 관심은 서양사상이었으며 특히 플라톤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다 2차대전 후 일본 주둔 미군 기지에서의 경험 이후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도 키워갔다. 예일 대학, 버지니아 대학, 워싱턴 앤 리 대학에서 가르쳤고 워싱턴 앤 리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이외에도 텍사스 대학,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홍콩 중문 대학, 인도 카르마 스리 디와카르 불교연구소에서 초빙교수로 강의했다. 현재는 버지니아 주 렉싱턴에서 거주하며, 버지니아 군사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이: 추미란
동국대학교와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인도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 독일에 거주하며 정신세계, 영성, 인문 분야에서 독어, 영어 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원네스』, 『생의 아침에 문득 돌아보다』, 『구루 종교 권위주의』, 『혼자 걷다』, 『자각몽, 또 다른 현실의 문』, 『달라이 라마의 고양이』, 『소울 포토』, 『평화 만들기 101』, 『빅 마인드』, 『빛의 길』, 『두려움과의 대화』, 『기적수업 안내서』 등이 있다. ccmr72@daum.net
목차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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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덕은 가르칠 수 있을까?
2.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가?
3. 과학은 방해꾼인가?
4. 경험론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5. 시간이란 무엇인가?
6. 동서양은 만날 수 있을까?

후기
옮긴이 후기
상세소개 위로
노(老) 철학자와 젊은 스님들이
인도에서 함께한 5주간의 철학 강의

예일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평생 대학강단에서 서양철학을 가르쳐온 해리슨 J. 펨버턴은 정년퇴임 이후 인도 북동부 다르질리에 위치한 칼림퐁으로 떠나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베트 불교 전통의 한 축을 이루어온 카르마 카규파의 최고 스승인 트린리 타예 도르제(17대 카르마파)를 비롯한 젊은 학승들에게 서양철학을 가르치는 5주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서양철학의 연구들을 살펴보고 불교철학과 비교하는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그들은 나이와 전공을 떠나, 붓다와 소크라테스의 만남에 대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열린 토론의 장을 만들어냈다. 이 책 『소크라테스, 붓다를 만나다』는 그 탐구와 교류의 과정을 진솔하고 상세하게 담아낸, 한 노(老) 철학자의 흥미로운 일지이다.


붓다와 소크라테스,
두 사람의 대화를 현재적 시점에서 상상해 보다

물질·외부 지향적인 서양의 정신과 내면의 깨달음에 집중하는 동양의 정신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저자인 해리슨 J. 펨버턴은 각자 다른 길을 걸어오고 다른 결실을 맺은 동·서양이 여전히 그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 두 전통을 건설적으로 아우르는 중도의 길을 찾기 위해, 동·서양의 정신을 각각 분석하고 비교하며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는 티베트 학승들에게 서양철학과 불교가 얽히는 지점과 관련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처럼 ‘덕은 가르칠 수 있는지’를 묻고,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 도전하며, 과학과 경험론의 유효성을 의심한다. 그리고 불교의 순환적인 시간관과 서양의 직선적인 시간관을 상호 비교한 다음, 동양과 서양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동양과 서양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니체,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서양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사상가들을 압축적이고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그들의 이론과 철학적 방법론과 심리를 시간·장소·배경에 상관없이 불교와 최대한 비교해, 어떻게든 동·서양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개념화와 이성에 진리가 있다는 서양적 사고와 이성 너머에 진리가 있다는 동양적 사고는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팽팽하게 대립한다. 서양에서는 이성적인 통찰이 끝까지 갈 때 그것이 곧 깨달음이고, 동양에서는 이성을 초월한 주객이 없는 그 어떤 상태가 깨달음이다. 서양의 깨달음으로는 동양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없고, 동양의 깨달음으로는 서양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 없다. 동양과 서양은 애초부터 그 목표가 달랐고, 따라서 그 방법론이 달라졌고, 그러므로 현재의 서로 다른 문화와 사회와 정신세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어이 동·서양을 만나게 한다.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써 만남을 주선한다. 저자와 학승들의 철학 강의는 열린 마음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그 어떤 토론도 가능했다. 서로에 대한 호의, 존중, 그리고 궁금함으로 마침내 동·서양은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책의 마지막에서 “이제 붓다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한 걸음 물러서게 한 다음 자유로운 탐구 속에서 서로 만나게 하세. 그 속에서 그 둘은 자신만의 사고 유형에서 상대의 그것으로 옮겨가볼 것이고 서로 양립불가함을 볼 것이네. 바로 그때, 그래 바로 그때, 이들은 따뜻하고 건전한 웃음 속에서 서로 만난 것이 아닐까?”라고 얘기한다.
이 책은 서구화된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꽤 유용한 가치를 제공한다. 그동안 동·서양의 정신세계는 매번 만날 듯하다가도 돌이킬 수 없는 대분열을 일으켜왔다. 분명 그 둘은 사상적으로 중도의 길을 걸을 순 없고,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성적 사고와 내면의 자유를 포기할 순 없다. 열린 마음으로 붓다와 소크라테스의 만남을 바라볼 때 서로에게 호의와 존중을 품게 되고,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움틀 것이다.
붓다와 소크라테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현재적 시점에서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사유의 폭은 물론 삶의 영역 자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책속으로 위로
불교적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 즉 인간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은 해탈이 될 것이다. 덕이란 잘 기능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그리스적 개념도 여전히 의미심장하지만, 불교도가 봤을 때 그 조건이란 이를테면 불성 혹은 무아(selfless)이다. 그렇기 때문에 덕에 대한 그리스적 해석은 불교의 그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40쪽

서양인들은 자주 동양의 사상을 모호하고 신비한 것 혹은 대체로 논리가 느슨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 스님들은 작은 그룹을 만들어 논쟁 연습도 하는데 그 논쟁은 매우 활기찬 게임 같은 것이다. 한 스님이 마치 미사일을 쏘듯 다른 스님에게 양손을 미끄러지듯 철썩 때리며 질문을 던진다. 질문 받은 스님의 대답에 일관성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상대는 그 즉시 알아채고 손을 힘껏 들어 올리며 지적한다. 이때 틀린 답을 한 스님은 원통해 한다. 질문은 “모든 것은 무상한가?” 혹은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는가?” 같은 것들로서, 답변은 재빠르면서도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50쪽

개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공포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 진실에 따르면 예술과 과학은 방해꾼들이다. 삶의 공포라는 진실과 대면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폴로적인 환상에 기대거나 디오니소스적인 망각에 의지해 자아를 상실한다. 디오니소스처럼 진탕 마시는 것이 삶의 본질에 맞게 사는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지만 계속 진탕 마시기만 할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의 표현을 약간 유화해서 “개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삶의 괴로움에 직면한다”라고 말해본다면 좀 더 나은 길을 볼 수 있거나, 혹은 상기할 수 있지 않을까? 붓다는 바로 이 점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자유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99쪽

불교대학은 불교를 공부하는 고급 과정의 학생들을 위한 곳이고 어려운 불교 사상들을 가르친다. 내가 아는 한 그 가르침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대학 내 서양철학 수업만큼 따라가기 어렵고 복잡하다. 거기에 덧붙여 스님들은 명상 수행도 하고 앞에서 언급했던 논쟁 수업에도 활발하게 참여한다. 그 결과 스님들은 겉보기에도, 속으로도 행복해 보인다. 스님들은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잘 웃으며 심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곱다. 그들의 교육 과정은 놀랍도록 전인적인 인간을 배출하고 스님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낸다. 나에게는 익숙한, 동료들 간의 긴장이나 질투, 경쟁은 거의 없다. 스님들은 그곳에서의 교육, 동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즐기는 것 같았다.
-116쪽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진리이고 그 진리에서 먼 곳에 있는 우리는 윤회(samsara), 그 삶과 죽음과 고통의 고리 속에 붙잡혀 있다. 하나의 원에서 그 둘레가 시작도 끝도 없이 중심점을 도는 것처럼, 윤회도 매 순간 시작이면서 끝인 둘레 위에서 진리를 중심으로 영원히 돌아간다. 원의 둘레가 중심점으로 결코 갈 수 없는 것처럼, 자연 과학과 역사에 대한 생각과 매혹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132쪽

서양의 성당, 교회, 사원, 교당만큼이나 불교 사당 혹은 절도 놀랍도록 영적이다. 그리고 의례, 의상, 의식들에도 유사점이 많다. 분명한 계급 관계도 그렇고 영적 수장이 있기 마련인 성직자 조직도 비슷하다. 서양의 많은 기독교 교파들이 그렇듯, 불교에서도 그 교파 내의 사람들은 특별한 삶의 방식을 따르고 그 삶의 방식은 가르침과 수행법에 의해 주입되고 유지된다. 비구, 비구니들의 삶도 기독교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고 보통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므로 맞다. 불교는 종교이다. 하지만 불교는 최고의 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스승에 그 초점을 맞춘다.
-159쪽

서양식으로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예리한 소크라테스 할아버지가 자신들의 노력을 보고 무엇이라고 할지, 그 어떤 질문들을 캐물어 우리의 생각을 다듬어줄지 종종 상상하곤 한다. 붓다를 만나도 유사한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붓다는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질문은 철학적 문제들만이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변화에 직면해서도 늘 우리의 사고에 깊이를 더한다. 우리는 뜻밖의 사태들과 그 사태들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면하며 살아간다. 그 질문들이 깊을수록, 우리의 마음이 더 열릴 것이고 그 어떤 깨우침을 얻을 가능성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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