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불교, 영화를 만나다 : 영화 속 불교코드를 읽다

영화 속 불교코드를 읽다

2018-04-05     유응오

불교, 영화를 만나다

영화는 세대가 소통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입니다. 최근 개봉한 ‘신과 함께’는 남녀노소 전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 산업은 활발합니다. 영화 관람은 이제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취미생활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영화제만도 영화진흥위원회 2018년 기준 136건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교영화제는 없습니다. 불교영화도 그 수가 적습니다. 국내에서 제작된 불교영화의 수는 손에 꼽히며, 해외에서 제작된 불교영화가 소개되는 일도 드뭅니다. 시야를 넓혀보면 생각보다 더 다양한 불교영화들이 있습니다. 불교 코드가 녹아있는 영화도 다수입니다. 해외에는 불교영화제도 개최됩니다. 해외에는 어떤 불교영화제와 불교영화가 있을까요? 우리는 영화제를 만들 수 있을까요? 불교, 영화를 만나봅니다.

 

01  해외 불교영화제에는 어떤 영화가 있을까  김우진ㆍ유윤정
02  영화 ‘길 위에서’ 이창재 감독 인터뷰  유윤정
03  영화 속 불교 코드를 읽다  유응오
04  불교영화제를 위한 첫걸음  유윤정

불교를 주제 삼아 전면에 드러내지 않아도, 영화의 세계관으로써 불교 코드를 읽을 수 있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에서 불교 코드는 어떻게 쓰였을까. - 편집자 주

 

불교를 제재로 한 영화로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를, 불교사상에 입각해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한 영화로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와 ‘클라우드 아틀라스’, 드니 뵐뇌브 감독의 ‘컨텍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    불교적 사후세계관 그린 ‘신과 함께’

1,400만 명 넘게 관객몰이에 성공한 ‘신과 함께 – 죄와 벌’은 중음계中陰界의 기간, 즉, 사후 49일 동안 사자死者가 겪어야 하는 7개 지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가람에는 명부전이 있고, 명부전에는 시왕十王이 모셔져 있다. 이는 『불설수생경佛說壽生經』에 명시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호민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신과 함께’는 우선 재미있다.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컴퓨터 그래픽에 관객들의 눈이 호강하고, 초호화 캐스팅된 주인공들의 연기에 관객들의 감정이 절로 몰입된다. 
그런데 재미에 비해 감동은 덜하다. 특히, 원작에 등장하는 지장보살의 현현顯顯 격인 진기한 변호사가 사라진 것은 다소 아쉽다. 조금 더 밀도 있게 불교사상에 입각해 죽음의 문제에 대해 천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의 전통적인 사후 세계관을 내세웠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가 남긴 족적은 크다고 할 것이다.

|        무심無心 깨달은 ‘네오’에겐 환幻의 매트릭스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중에서 불교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만 초점을 맞춰보자.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으려고만 하세요.”
“무슨 진실?”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아요.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동자승과 네오가 주고받는 문답이다. 이 문답은 『육조단경』에 나오는 ‘풍동번동風動幡動’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서 마이클 브레니건 교수는 숟가락, 혹은 거울의 이미지에 주목하면서 선불교의 무심無心에 주목한다. 네오와 모피어스의 대련 장면이 다쿠안 소호 선사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네오는 무심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의 힘으로 스미스 요원이라는 강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매트릭스라는 사이버스페이스의 공간이 불교사상의 근간인 연기나 화엄 사상과 고스란히 맞닿는다. 실재와 허구가 맞물린 사이버스페이스 공간을 연기적인 세계관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아바타’도 연장선상에 서 있다.  

|    자비심 발아發芽시키는 ‘클라우드 6중주’

워쇼스키 남매의 영화 중 가장 불교사상적으로 심원한 영화는 ‘클라우드 아틀라스’다. 이 영화는 1849년부터 2346년까지 500여 년 동안 펼쳐지는 여섯 개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교차로 진행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영화는 마치 모자이크 기법의 회화처럼 각기 다른 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영화의 주연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연령과 성별을 바꿔가면서 등장한다. 여섯 개의 이야기 조각을 하나로 엮어내는 솜씨는 빼어나지만, 사건들이 교차 편집되다 보니 서사의 완결성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산만한 구성은 애초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시공을 초월해 연결돼 있으며, 그 삶의 양태는 반복된다는 주제의식에 기여하기 위한 구성인 것이다. 영화의 주제에 대해서 라나 워쇼스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에 그런 대사가 나온다. ‘존재하는 것이란 곧 지각되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조지 바클리가 한 말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누구도 혼자 인간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최고 미덕은 그 주제가 연기사상에서 자비사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에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미래를 향해 걸어 나간다. 누구는 흑인과의 우정을 통해서 노예제에 반대하게 되고, 누구는 인류와의 사랑을 통해서 클론임에도 혁명가가 되고, 누구는 마음속 연인을 그리면서 ‘클라우드 아릍라스 6중주’를 작곡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관계 속에서 사랑(혹은 자비)을 마음에 발아發芽하게 되는 것이다. 

|    “사랑한다면 처절한 운명도 받아들이라”

드니 뵐뇌브 감독의 ‘컨택트Contact’는 최근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다. 영화는 어느 날 전 세계 12개 지역에 비행물체가 정착하면서 시작한다. 미국 정부는 언어학자인 루이스와 물리학자인 이안에게 외계인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를 알아봐달라고 요청한다. 외계인의 외모는 구체적으로 카메라에 담지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는 문어를 닮았다. 외계인과의 대화는 언어가 다른 탓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1차적으로 두 문명의 대화가 물꼬를 트는 것은 루이스가 영어 단어들을 보여주면서부터이다. 루이스가 영어 단어들을 써서 보여주자 외계인들도 자신들의 문자들을 보여준다. 외계인들의 문자는 인류의 상형문자를 떠오르게 하는데, 형태상 가장 유사한 것은 일원상一圓相이다. 그렇게 인류와 외계인은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루이스는 불가해한 환상을 연이어 경험한다. 그 환상은 미래에 자신이 딸을 키우고, 딸이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모습이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여느 SF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서 외계인은 침공하기 위해서 지구에 온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극적 구성에 의해 긴장감이 유지되지 않는다. 


‘외계인들이 왜 지구에 왔는가?’하는 질문이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외계인의 글씨는 허공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동안 명확하게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문자의 형상이 소멸할 때는 타고 남은 재가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흐르는 물에 붓을 날린 것 같기도 하다. 완미完美의 찰나 허공에 흩어져버리는 티베트의 모래 만다라를 떠올리게 한다.
우주대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야 루이스는 외계인이 지구에 온 이유를 알게 된다. 외계인은 지구를 도우러 왔고, 도우려는 이유는 3천 년 후 외계인들이 지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수시로 미래가 현재의 사건에 개입한다. 하지만 미래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루이스는 이안이 떠날 것을 알면서 사랑하고, 이안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불치병에 걸려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운명을 달게 받아들인다. 루이스의 태도는 지구에 오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순례를 마다하지 않는 에봇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영화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면서 끝이 난다. 아니, 끝이 남으로써 다시 시작된다. 그렇게 끊임없이 영겁회귀永劫回歸한다. 그 구성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없는 외계인의 언어를 떠올리게 하고, 일원상 같은 외계인의 문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루이스로서는 사랑함에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딸 한나HannaH의 스펠링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를 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공간을 비선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비선형적인 시공간에서 루이스가 택하는 삶은 처절하다 못해 숭고하다.   
루이스에게 미래란 이안과 사랑하고, 그 사랑의 결과로 딸을 갖는 기쁨의 시간인 동시에 이안이 떠난 뒤 딸마저 잃어야 하는 슬픔의 시간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루이스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숨을 타고난 모든 존재의 미래이기도 하다.  
드니 뵐뇌브 감독의 최근작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리들리 스콧의 원작에 나타난 “마치 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금강경』 중)” 모든 존재의 공空한 본성을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하면서도, 그 주제의식을 더욱 심원하게 파고든다. 창조자(인간)도 피조물(인조인간)과 마찬가지로 결국 자신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 있어 유한한 삶을 영원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유응오
불교계 언론사 편집장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 종무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불교신문」, 「한국일보」에서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했다. 저서로 『영화, 불교와 만나다(조계종출판사)』, 장편소설 『하루코의 봄(실천문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