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세상을 바꾼 현대 불교 철인들 : 태허 대사

중국・대만 현대불교의 주춧돌

2017-06-15     조환기

세상을 바꾼 현대의 불교 철인들

이번 호 특집은 근・현대 세계불교 역사 속에서 붓다를 따르는 수많은 수행자들 중 세상을 바꾸는 데 사상적으로 기여하거나, 혹은 직접 뛰어들었던 인물을 집중 조명해 봅니다. 각 인물이 겪고 만들어갔던 역사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구조로 풀어 가면 ‘세상을 바꾼’ 사건들이 입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에 초점을 둔 것은 우리 시대와 함께 살면서 인물을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어 정보의 양이 풍부하고 대중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불교 철인’은 불교가 지향한 가치와 철학을 중심에 두고 현실을 변화시킨 불교인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겹쳐서 세상을 바꾼 현대의 불교 철인을 찾아봅니다. 

01    서구에 선불교를 전달하다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  / 원영상
02    중국・대만 현대불교의 주춧돌 태허 대사(1889-1947)  / 조환기
03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해방시킨 암베드카르(1891-1956) / 김명권
04    위빠사나 대중화의 시작 마하시 사야도(1904-1982)  / 김재성
05    참여불교의 제창자 틱낫한 스님(1926-)  / 유윤정
06    현대 불교의 위대한 스승 제14대 달라이 라마(1935-) / 김성동

| 욕을 참 많이 먹었던 사람

태허

누구나 주어진 시대 상황 속에서 파란만장한 질곡을 겪으며 생멸해가지만 태허(太虛, 1890-1947) 대사만큼 동서남북을 종횡하며 파격적인 삶을 산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정중동靜中動의 불교문화 특성상 출가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그는 ‘나의 불교혁명 실패사’라는 글에서 스스로를 사람들로부터 ‘존경, 혹은 두려움, 혐오, 동정’을 받는 사람이라 평가하였다. 나의 억측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말하는 ‘존경’이란 단순한 존경의 의미 같지는 않아 보인다. 스스로 말하기는 체면도 서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저 없이 행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복합적 심리로서의 ‘존경’일 것이다. 그는 열강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는 청나라의 부끄러운 민낯, 청의 몰락 이후 권력을 향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사투, 일본의 중국 침략과 대살육의 격동기를 두루 거치며 살았다.

태허가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 승려’라는 것이다. 물론 현재 대륙이나 대만의 불교학자들은 태허가 당시 욕을 들었던 일은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고, 출가자들은 더욱 태허를 영웅으로 그리려고 한다. 그러나 살아생전 태허는 욕을 참 많이 먹었던 사람이다. 비교적 객관적으로 태허에 대해 회상한 20세기 후반 수행자 남회근(南懷瑾, 1918-2012)이 출가자들을 모아 놓고 참선지도를 하면서 했던 회고의 말이 이것이다.

“당시 나는 태허 대사를 좀 삐딱하게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존경하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 불교에서 승려들이 바뀐 것은 모두 그 사람 덕분이다. 원래 다들 태허를 보고 정치 승려라고 욕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신문기사를 썼고 혁명가들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다들 그를 정치 승려라고 욕했던 것이다. 해만 뜨면 하루 종일 정치가들과 왕래하니, 당시 우리는 그를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싫어했고 불도佛道를 제대로 닦지 않는 자라고 여겼다. … 그러나 나중에 나는 그가 선정禪定의 힘을 갖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남경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 중앙정부에서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마침 남경에 그의 제자와 친구가 많이 있어서 그가 남경에 도착하자 고위인사들과 관료들이 그를 맞이하러 마중 왔다. 그가 기차에서 내렸는데 소변이 마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바지를 내리고 사람들이 보는 데에서 오줌을 갈기는 것이 아닌가! 앞에 대기하는 사람들을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개의치 않는 경지, 그는 미친 사람도 아닌데 바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갈긴 것이다. 그를 맞이하러 나온 ‘나리님들’이 바로 그를 부축했다. 스승님, 제발 이쪽으로 와서 오줌을 누시라고. 그런데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마중 나온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는데 다들 주요 인사들이었다. 당시 나는 그가 안경을 쓴 것을 보았다. ‘아, 이 화상은 하루 종일 선정에 있구나.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회근은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제자들도 많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제자로 귀의하면서 모두 스승에게 돈을 바쳤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한 푼의 돈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즉 단 한 푼도 그의 손을 거쳐 간 적이 없었던 거다. 돈이 산처럼 쌓여도 돈을 만지지 않는 것, 이것이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니까. 태허는 얼마가 들어오고 어떻게 쓰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일생을 이렇게 살았다. 말이야 쉽지만 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는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 불교를 통해 사회를 다시 세우자

태허는 1904년 16세에 출가했다. 작은 사찰에서 승려가 된 그가 당시 호남에서 막 천동사 주지로 부임한 팔지두타八指頭陀 기선(寄禅, 1852-1912) 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기선 대사의 인맥으로 그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고승들로부터 불교를 배웠으며, 세계 사정에 밝은 재가 지식인으로부터 영어 공부를 할 기회도 얻었다. 동료들은 “지금 출가자보다 더 학문이 높고 수행이 높은 재가불자가 있으니, 이런 분 밑에서 불교를 새롭게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재가 거사가 양문회(楊文會, 1837-1911)였다. 양문회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당대의 재가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유학儒學이 무너진 중국 사회에서 불교를 통해 사회를 다시 세우려는 열정으로 뭉쳤다. 나라 경제가 쪼들리자 정부에서는 틈만 나면 사찰 재산을 몰수하여 정부 예산에 편입시켜 사용하려고 했다.

이에 태허와 몇몇 젊은 출가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1912년 초 태허와 인산(仁山, 1887-1951) 등 젊은 출가자들은 중국 불교 권력의 중심이면서 가장 재산이 많았던 남경 근처 진강의 금산사로 갔다. 이들은 금산사가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산문을 봉쇄해 버렸다. 금산사의 재산으로 현대식 불교대학을 세워 제대로 된 출가자 인재양성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금산사 승려들은 젊은 출가자들을 폭력으로 막았다. 격분한 인산은 탁자 위로 뛰어 올라 외쳤다. “여기 금산사 300명의 승려들이여, 너희 중 편지라도 제대로 한 통 쓸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목을 잘라 오늘밤 너희들의 요강으로 바치겠다!” 그러나 며칠 후 금산사 승려들은 수십 명을 동원하여 태허와 인산 등을 각목으로 때려 중상을 입히고 내쫓았다.

 

| 불교교리, 불교제도, 불교재산의 혁명

중국의 불교는 극도로 타락하여 수행은 게을리 하면서도 ‘불립문자’를 주장하며 글공부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양문회가 “승려들이 고루함에 빠져 공부도 안 하고 기술도 익히지 않는다. 중국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가장 타락한 시대가 지금”이라고 한탄하였고, 또 양문회의 제자 구양점이 “중국에 승려가 백만이나 불법을 제대로 알고 주지 자리를 감당할 수 있고 비구라 부르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는 새벽별만큼이나 드물다. 그 대다수는 유랑하며 놀기나 좋아하는 자들로, 새벽부터 밤까지 밥이나 받아먹는, 진실로 나라의 큰 좀 벌레”라고 했겠는가.

1912년 62세의 기선 화상은 사찰재산 보호를 위해 중앙정부와 교섭하러 북경으로 갔으나, 내무부 직원과 담판을 하던 중 직원으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았고, 따귀까지 맞았다. 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지경을 당해서야 불교계는 비로소 한목소리를 내며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대총통 원세개(1859-1916)는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불교재산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태허는 불교 내부적으로 ‘혁명’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1913년 스승 기선 화상 추도회에서 태허는 ‘불교 혁명’, 즉 불교교리, 불교제도, 불교재산의 혁명을 외쳤다.

‘교리혁명’의 골자는 혹세무민의 미신불교를 혁파하고 대승불교의 자리이타 정신으로 돌아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에 ‘인생불교人生佛敎’ 이론으로 발전하였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대만 불교의 핵심 사상인 ‘인간불교人間佛敎’ 사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제도혁명’의 골자는 승려의 생활과 승려조직을 개혁하여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승단을 꾸리자는 것이었다. ‘재산혁명’의 골자는 법맥 중심으로 사찰 유산을 계승하던 구습을 버리고, 모든 승중이 재산을 공유하며, 나이든 출가자의 노년을 책임지고, 청년 출가자 인재 양성에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불교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사람이 경망스럽게 목소리만 크다며 출가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었지만, 지식인 재가자들은 연구와 수행의 고등 교육기관을 만들어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 가는 곳마다 불교교육기관을 만들다

그는 극한 번민에 빠졌고 결국 보타산에서 약 3년간 폐관하여 정진하였다. 태허는 가는 곳마다 불교교육기관을 만들었다. 태허가 만든 교육기관은 그 수가 매우 많다. 그가 관여한 불교교육기관을 살펴보면 복건성 하문의 민남불학원閩南佛學院, 호북성 무한武漢의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 중경重慶의 세계불학원 한장교리원世界佛學苑 漢藏敎理院, 섬서성 서안西安의 팔리(巴利)삼장원三藏院, 북경의 불교연구원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출가자를 위한 전문 교육기관으로 신식 교육체제를 따랐다.

당시 혼란한 정세로 이들 기관들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3~4년을 가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태허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현재 자제공덕회 증엄 스님, 불광산사 성운 스님 등 대만의 대표적 불교 인물들은 모두 짧은 기간이나마 태허가 세웠던 근대식 불학원에서 공부한 인물이거나 그들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대륙 공산화 후 대만에 정착했던 것이다. 중국대륙 개혁개방 후 불교 교육기관이 재건되고 있는 곳은 대부분 태허가 과거에 불학원을 세웠던 곳이다.

태허는 해외불교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고, 또한 제자들을 해외로 유학하게 하여 새로운 불교학을 배우게 하였다. 20세기 초 남방의 소승불교와 티베트 불교에 대한 연구가 다시 일어난 것은 구양점(歐陽漸, 1871-1943)을 중심으로 한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院과 태허가 해외에 파견한 제자들에 의해서였다.

이처럼 중국의 불교는 20세기 초 가장 타락하고 가장 위태로웠으나, 불교 부흥에 힘썼던 몇 사람들에 의해 과거 어느 시대보다 찬란한 불교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태허와 몇몇 불교인이 순수한 열정으로 뿌린 씨앗이 발아하면서 위기는 오히려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대륙과 대만의 불교계에서는 종종 오늘의 불교를 당나라 불교와 비교하기도 하고, 일부 고승이나 거사를 당나라 현장 법사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런 자부심은 가장 척박하고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현실에 안주하거나 적당한 개혁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태허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환기

연세대에서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던 중 불교철학에 매력을 느껴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인도불교의 유식을 전공했다. 동국대 등에서 강의했고, 동명대 불교문화학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동국역경원에서 다수의 경전과 논서를 번역했고, 역서로 『서양학자가 본 대승불교』, 『불법의 근본에서 세상을 바꿔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