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근대 선지식의 각오와 발심, 가행정진 엿보기

가행정진, 나의 숙업을 바꾸다

2016-01-27     김성우

편집자

숙업宿業. 업의 뿌리는 깊습니다. 이 정도 팠으면 업의 뿌리가 나왔을까 하면 더 깊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과거 전생을 모두 다 봤다는 것은 바로 이 업의 뿌리를 봤다는 것입니다. 그 첫 길, 부처님처럼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이를 넘어가기 위해 옛 스승들은 게으른 몸을 칼날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가행정진입니다. 게으른 몸은 숙업입니다. 숙업은 욕망, 불안, 죽음 등과 함께 있습니다. 숙업을 넘는 길, 불교의 첫 길, 가행정진은 숙업을 녹입니다. 숙업을 바꿉니다. 오래된 경전 『숫타니파타』는 불자들에게 이렇게 경책합니다. “일어나라! 앉으라! / 잠을 잔다고 그대들에게 /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화살을 맞아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이에게 / 참으로 잠이 웬 말이냐?” (일아 스님 역, 불광출판사) 

부처님의 삶은 가행정진의 삶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보셨던 그 길을, 2016년 첫 날, 우리 불자들이 가봅니다. 홀로 가도 좋고, 도반과 같이 가도 좋습니다. 올 한 해 나의 숙업을 바꾸는 한 해로 만들도록 서원합니다.

01. 부처님의 가행정진 / 성재헌
02. 근대 선지식의  각오와  발심, 가행정진 엿보기 / 김성우
03. 불교수행하는 정신과 의사 전현수 박사 인터뷰 / 하정혜
04. 경남 양산 정토원 철야정진 현장 / 정태겸
05. 청화스님의 가행정진 법문 / 청화스님

 
한 때는 주말마다 철야정진을 하고 밤을 새워 경전과 선어록을 공부하며, 출퇴근 시간마다 선사들의 법문과 경전을 테이프로 들어가며 환희심에 젖어 산 적이 있다. 12년 전에는 조계사에서 모 선사의 법문을 듣고 법열法悅에 젖어 마음이 밝아지는 체험을 한 이후, 경전과 선어록을 보는 안목이 완전히 달라지고 비로소 무엇을 찾고 구하는 갈망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시절이 도래하기도 했다. 

그 이후 좌선 또는 간경, 행선, 염불정근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더욱 더 불법佛法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만하면 그 무엇에도 의지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불법을 전하며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수행을 통해 얻어진 힘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사회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경계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오해와 갈등이 실로 더 큰 공부거리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그야말로 “좌선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라고 한 누군가의 말을 되씹으며 동중선動中禪을 쉼 없이 연마하고 있다.

또 다른 반백의 삶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근대 선지식의 가행정진’이란 주제로 글을 청탁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끝없이 초월하라는 경책의 죽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 500년의 암흑기를 뚫고 불교중흥의 서막을 밝힌 근대 스승님들의 구도기는 어느 한 분 뺄 수 없을 정도로 땀과 피로 얼룩지고, 목숨을 내어놓은 용맹정진으로서 그들은 한결 같이 깨달음을 얻은 후 자비행을 실천한 분들이었다.

지면 관계상 모든 분들을 소개하진 못하고 치열한 수행을 통해 도를 얻고 철저한 보림保任 공부를 마친 후, 저잣거리에서 자비의 손을 드리운 대표적인 고승 네 분의 구도기를 통해, 독자와 더불어 재발심의 기회를 가져본다.

 

| ‘콧구멍 없는 소’가 된 경허 스님

원효 스님이 신라불교의 새벽을 연 인물이라면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스님은 서산 대사 이래 침체되었던 한국불교의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이다. ‘제2의 원효’, ‘한국의 마조馬祖’로 불리는 그는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의 실천자로서 철저한 수행과 깨달음, 보림,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전형을 완벽하게 보여준 선지식이다.

경허 스님은 20대 후반에 이미, 경ㆍ율ㆍ론 삼장에 정통하고 유학과 노장까지 두루 섭렵한 당대의 대강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1879년, 스님은 옛 스승인 계허 스님을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앉아 밤새도록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 생사가 둘이 아니다)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돌아보고 새로운 발심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경허 스님의 머리 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 하나의 공안이 저절로 떠올랐다. 바로 위앙종의 대선사 영운지근(靈雲志勤, 771~853) 스님에게서 비롯된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였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니, 이게 대체 무슨 도리일까. 의문은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처럼 자꾸 커졌다.

동학사로 돌아온 경허 스님은 스승 만화 스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 조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신이 가르치던 여러 학인들도 모두 해산시켰다. ‘깨닫기 전에는 결코 조실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몸을 꼿꼿이 해 앉았다. 조실 방 한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하루 한 끼 공양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폐쇄하고, 결가부좌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소위 ‘무문관無門關’수행의 원조가 된 셈이다.

경허 스님은 화두를 전심전력으로 참구하며, 밤에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3개월 동안 처절한 수행을 하였다. 생사生死, 두 글자를 이마에 붙여두고 밤낮으로 용맹정진하여 3개월쯤 되자 수마가 물러가고 혼침과 산란심이 끊어지고, 종일토록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리게 되었다. 이튿날 눈을 뜨면 어젯밤에 들고 자던 화두가 그대로 들려져 있었다.

경허 스님이 용맹정진한 지 석 달이 지난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때 동은東隱이라는 사미승이 스님의 시봉을 들고 있었다. 동은은 경허 스님이 참선하는 바로 옆방에서 아버지 학명 스님에게 우연히 들은 화두를 다른 사미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물었다.

“너네들,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니?”

“소가 되는 이치가 뭔데?”

“글쎄, 그게 뭘까?”

“야, 소가 돼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된단 말야.”

동은은 커다랗게 말했다. 그런데 사미승의 그 말이 참선 중인 경허 스님의 뒤통수를 “꽝” 하고 때렸다. 『경허집』에는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 한 마디에 스님은 대지가 그냥 내려앉았으며, 만물과 나를 함께 잊고 온갖 법문의 끝없는 오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풀렸는데, 때는 기묘년(1879년) 겨울 11월 보름께였다.”고 했다. 원래 ‘콧구멍(鼻孔)’이란 말은 불성佛性, 본각本覺의 기미를 의미한다. 고삐를 꿸 콧구멍이 없는 소는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다. 그 자신이 바로 바로 자유와 해탈 자체가 된 것이다.

경허 스님의 위대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880년 봄, 스님은 천장암으로 수행처를 옮겨, 깨달은 뒤에 ‘닦음 없이 닦는’ 철저한 보림 공부에 들어간다. 지고 온 바랑에서 옷 한 벌을 내어 솜을 넣은 두툼한 누더기 한 벌을 손수 지어 입고, 곧바로 쪽방으로 들어가 이듬해 6월까지 1년여 동안 상상조차 어려운 보림을 시작한 것이다. 1년 동안 단 한 번도 눕지 않고 장좌불와 했으며, 공양을 들거나 대소변을 보는 일 외에는 바위처럼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수도 하지 않고 몸도 씻지 않고 누더기 한 벌만 입은 채 보냈기에 온 몸에는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이가 들끓었다. 경허 스님은 깨닫기 전과 후에도 이처럼 한결같이 용맹정진을 했다. 작은 깨달음에 안주하기 쉬운 오늘날,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경허 스님은 1886년, 6년 동안의 보림공부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독특한 기행奇行과 함께 경허 스님은 활발한 선문답과 법문, 행동으로 선禪의 생활화,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스님은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모든 명예를 벗어던지고 갑산, 강계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실로 ‘저잣거리에서 자비의 손을 드리우다’ 아무런 흔적[相]도 남기지 않고 떠난 바 없이 떠난 십우도의 전형을 보여준 위대한 일생이었던 것이다.

 

| 천수대비주로 삼매에 든 수월 스님

경허 스님의 수제자인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의 수행일화 역시 용맹정진과 깨달음, 보림, 보살행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란 스님은 어느 탁발승의 수행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명을 받아 1883년 나이 서른에 서산 천장암을 찾아갔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경허 선사의 친형인 태허 스님은 수월에게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허락했고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같은 해 겨울, 수월 스님은 뒷간에 앉아 일을 보다 삼매에 들 정도로 일념으로 천수대비주를 외우며 용맹정진을 했는데, 이레째 되는 날 밤 몸에서 불기둥이 뿜어져 나오는 방광放光을 체험하고 세 가지 특별한 힘을 얻었다. 즉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게 되었고, 잠이 없어져 버렸으며, 앓는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스님은 보림 공부를 위해 천장암을 떠나 금강산 유점사에서 신분을 숨긴 채 여전히 땔나무를 해 나르며 한 철을 지냈으며, 1891년에는 경허, 제산 스님 등과 호서지방을 돌면서 함께 수행했고, 1892년경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조실로 추대되었다. 1896년 지리산 천은사 상선암과 우번대로 수행처를 옮긴 스님은 이곳에서도 밤새 삼매에 들어 몸에서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어찌나 크고 강렬했던지 천은사에 살던 대중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몰려왔다고 한다.

1910년 신분을 감춘 채 훈장노릇을 하던 스승을 어렵게 만나 2년간 모신 수월 스님은 1912년 경허 스님이 열반에 든 소식을 당시 수덕사 만공 스님에게 알려준 후,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들어갔다. 백두산 기슭에 있는 도문시 희막동에서는 3년 동안 소먹이 일꾼 노릇을 했다. 이때 스님은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치는 짬짬이 주먹밥을 만들어 놓았다가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동포들을 위해 산 바위 위에 주먹밥과 짚신을 올려놓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베풀었다.

스님은 1915년 흑룡강성의 수분하로 들어가 관음사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 채 어떤 젊은 스님에게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림 공부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 뒤 1921년 봄 왕청현 나자구에 들어가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라는 작은 절에 머물며 누더기를 걸치고 날이 밝으면 종일 들이나 산에 나가 말없이 일했고, 탁발을 자주 다녔으며, 생식을 했고,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산짐승ㆍ날짐승과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스님이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 금오, 효봉, 청담 스님 등이 찾아와 몇 달 혹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1928년 음력 7월 16일, 스님은 “개울에 가서 몸 좀 씻겠네.”라고 하고선 절 뒤편 송림산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결가부좌로 입적했다. 세수 74세, 법랍 45세였다. 입적 후 7일 동안 밤마다 송림산에 불기둥이 치솟는 대방광이 일어났고, 산짐승과 날짐승이 떼를 지어 울었다고 전한다. 이토록 많은 불가사의한 일화를 남긴 것은 그만큼 스님의 깨달음과 삼매三昧의 힘, 중생구제의 원력이 큰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리라.

 

| 토굴에서 ‘무無’자 화두 타파한 효봉 스님

서른 여덟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늦깎이’이다. 판사 출신의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자각하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자지 않고 분발하여 오로지 정진에만 애쓴 결과 당대의 선지식이 되었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효봉 스님은 조주 스님의 ‘무無’자로 평생 화두를 삼았다.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에서 안거에 들어간 스님은 꼬박 한 철(석 달) 동안을 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 정진했다. 한번은 공양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엉덩이에 무언가 달라붙는 게 있어 돌아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진물이 흘러 가사와 방석이 달라붙어 있었다. 살이 허물어지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에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공부하고, 오후엔 먹지도 않았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생겼다.

출가한 지 다섯 해,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님은 1930년 늦은 봄,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금강산 법기암에 직접 지은 무문관 토굴에 들어갔다. 그때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입은 옷에 방석 석 장뿐, 하루 한 끼 공양을 조그만 창문으로 들여보내 줄 것만을 당부했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지나갔다. 그리고 새 봄. 하루는 시자가 공양을 가지고 가니 그 전날 놓아둔 공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

이 소리에 스님은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문 입구에 있는 것을 의식했다. 그 전날부터 공양이 온 줄도 모르고 선정삼매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 날 아침. 드디어 토굴벽이 무너졌다. 1년 6개월 만에 토굴에 들어갔던 스님이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나온 것이다. 토굴 밖으로 나선 스님은 한 발자국도 떼어 놓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하고 그새 세수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만은 환하게 빛났었다고 전하며, 석두 화상에게 오도송을 지어 올려 인가를 받았다.

1932년 사월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은 스님은 깨달음을 인정받고도 보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33년 여름 여여원如如院에서 수행하며 오후에는 불식不食하였고, 겨울에는 마하연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이어서 전국의 적멸보궁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였고,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 스님과 만공 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았다.

1937년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에 머물며 10년 동안 납자들을 지도한 스님은 늘 직접 죽비를 들고 선방에서 경책했으며, ‘동구불출(洞口不出: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음), 오후불식, 장좌불와, 묵언’의 4가지 규약을 정해 이를 엄격히 지켰다. 그리고 늘 조주 스님의 무자 화두를 들어 “무無라, 무라…” 하고 입버릇처럼 외워 ‘무라 스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이뭣고’ 화두 타파로 대문 빗장 연 경봉 스님

역대의 선사들과 마찬가지로 경봉(鏡峰, 1892~1982) 스님도 화두를 참구하며 참선정진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특히 망상, 졸음, 혼침, 산란에 지겹도록 시달려서 스스로 용기를 잃고 물러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4세에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가진 첫 안거부터 졸음과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니 좌절감은 더욱 컸다.

1927년, 경봉 스님은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 스님과의 선문답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하면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철야로 불사를 하며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마침내 대자유를 얻은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와 가람 중창불사에 헌신하였고 통도사 산내 암자인 극락선원에 조실로 머물면서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하였다. 늘 공부하는 수좌들을 아꼈던 스님은 팔순의 고령에도 몸소 밤을 새우며 정진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스님은 졸음과 망상을 쫓는 치열한 정진과 동시에 참회와 업장 소멸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곤 했다. 특히 업장을 녹이는 방법의 하나로 마음을 겸양하는 하심下心을 가르쳤다.

1982년 7월 17일, 스님은 세수 91세, 법랍 75세로 열반에 들면서 “나 죽은 뒤 내 모습이 보고 싶다면… 야반삼경(夜半三更: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하는 유명한 화두를 남겨 오늘날까지 후학들에게 공부거리를 남겨주고 있다.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행복, 즉 열반涅槃을 향해 수행에 올인 하는 스님들과 달리 재가 불자들은 자주 선방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사실상 더 꽉 막힌 선방에서 오늘도 용을 쓰며 살고 있다. ‘지금 여기’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풀어가야만 하는 ‘문 없는 문’[無門]의 관문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아서 더욱 열기가 어렵다고나 할까.

선방에서 정진 중인 수좌스님이나 밖에서 생활 속의 마음공부를 하는 이 모두가 ‘문 없는 문’의 빗장을 풀고 마침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불제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옛 선지식들의 각고刻苦의 구도심을 본받아 ‘지금 당장’ 그 문을 열지 못하면 영원히 열지 못한다는 각오와 발심으로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우리가 공업共業으로 인식하는 불국토의 실현은 더욱 앞당겨질 것이다.

 

김성우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현대불교신문 취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도서출판/책방 비움과소통, 비움과소통몰(bns-mall.co.kr) 대표를 맡고 있다.